변치 않는 명품 가치… MZ세대 “중고로 사면 뭐 어때”

과거 제품이라도 브랜드 히스토리 녹아 있어
어중간한 브랜드보다 중고 명품 선호도 높아
얇은 주머니 사정… 신상 못사도 중고는 가능
Y2K 패션의 재림도 한몫… 미국∙일본서도 강세
패션업계, 중고명품 시장 새 먹거리로 떠올라

[정희원 기자] “20년 전 구매한 디올 새들백입니다. 백화점 영수증은 버렸고요. 더스트백과 개런티카드 모두 있습니다. 연식이 오래돼 저렴하게 내놓습니다.”

 

중고거래 플랫폼에 70만원에 올라온 20년 전의 가방은 하루도 되지 않아 판매 완료됐다. 2018년 디올이 다시 옛 인기 디자인을 재해석해 출시한 이후로 100만원 이하에 나오는 ‘새들백’은 빠르게 품절된다. 2018년 초만 해도 중고명품거래 사이트에서 같은 모델이 10∼15만원 사이에 팔리던 것과 대조된다.

 

업계에 따르면 최근 MZ세대 사이에서 중고명품 거래가 부상하고 있다. 내가 원할 때 갖고 싶은 모델을 구입하고, 물건이 질리면 다시 중고장터에 내다 파는 게 하나의 트렌드로 굳어졌다.

 

중고명품 쇼핑을 즐기는 이유에 대해 이용자들은 “명품 브랜드의 가치가 변치 않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은다. 패션업계에서도 중고명품 거래는 떠오르는 먹거리로 부상한 상황이다.

 

국내 중고명품 거래 시장은 2012년 1조원에서 2019년 말 기준 약 7조원 규모로 7배가량 성장했다. 연평균 성장률만 놓고 보면 30%가 넘는 수준이다.

사진=더리얼리얼

◆‘양품’ 많이 나오는 지역 찾아라… 당근마켓 ‘원정 인증’

 

현재 번개장터·당근마켓 등 기존 중고거래 플랫폼에서는 지속적으로 중고 명품이 올라오고 있다. 제품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당장 백화점 등에서 신상을 구입하는 것보다는 훨씬 저렴하게 명품을 가질 수 있는 것은 확실하다.

 

당근마켓은 최근 명품 격전지로 부상하고 있다. 이는 자신의 거주지를 기반으로 중고거래를 할 수 있는 플랫폼이다. 하지만 중고명품 구매를 고려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실거주지가 아닌 좋은 품질의 물건이 많이 나오는 특정 지역으로 ‘원정’을 떠나기도 한다. 인기 지역은 서울 강남구 일대, 한남동 일대 등이다.

 

대학생 A모씨(23)는 “오랜만에 강남에 사는 친언니네 집에 온 김에 당근마켓 동네 설정을 언니네 동네로 했다”며 “평소 중고 명품 구경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이 동네에서 괜찮은 물건들이 많이 나와서 종종 애용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중고 명품족들이 선호하는 지역에서는 ‘보물찾기’가 가능하다. 기존 중고명품 플랫폼에 비해 저렴한 가격으로 득템할 수 있는 기회도 많다.

 

A씨는 “대체로 40대 여성들이 10~20년 전에 구매해 보관하던 것을 많이 내놓는 분위기”며 “수익 목적보다 취미로, 옷장을 비우기 위해 내놓은 물건들이라 상태도 좋고, 거래 면에서도 시원시원하다”고 말했다.

 

◆SNS 빈티지숍 강세… 제품 구비는 ‘중고거래플랫폼’서

 

코로나19 사태가 터지기 전만 해도, 당근마켓에서의 명품쇼핑은 ‘아는 사람만 아는’ 쏠쏠한 방법으로 통했다. 하지만 현재는 일반 구매자와 숍 운영자가 양품을 두고 경쟁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같은 배경에는 코로나19 사태 이후 명품 소비 트렌드가 확산되며 인스타그램 등 SNS 위주로 활동하는 개인 ‘빈티지 명품숍’들이 늘어난 것과 관련이 깊다. 빈티지 명품숍들은 특유의 감각적인 사진과 라이브방송 등으로 고객과 소통하며 인지도를 넓히고 있다. 실제로 인스타그램에 #빈티지명품을 검색하면 약 10만개의 게시물이 나온다.

인스타그램에서 중고명품을 검색하면 19만 4000여개의 게시물이 나온다. 사진=인스타그램 캡처

직장인 B씨(29)는 “최근 SNS에 ‘빈티지 명품’을 앞세워 중고 명품을 판매하는 계정주들은 당근마켓, 번개장터 등에서 물건을 구입한 뒤 다시 웃돈을 붙여 판매하는 경우도 많은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고민하는 사이 아쉽게 놓쳐 구매하지 못한 3만9000원에 판매되던 20년 전 디올의 하트백이 한 빈티지숍에서 그날 바로 20만원대에 팔리고 있더라”며 “최근에는 중고거래 플랫폼에서도 이같은 분위기를 읽었는지 전체적으로 가격이 상향됐다”고 말했다.

 

◆중고명품 인기는 전세계적 현상… MZ세대가 이끈다

 

이같은 ‘중고명품 품귀 현상’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미국의 중고명품 판매 플랫폼 ‘리얼리얼’이 2022년 발간한 ‘리셀 리포트’에 따르면 이곳을 이용하는 고객의 40%는 패스트패션 대신 중고명품을 구매했다. 또, 43%의 고객은 지속가능한 소비를 위해 중고제품을 구매한다고 답했다.

 

재미있는 것은 X세대가 질려서 파는 물건들이 MZ세대에게 ‘힙한 아이템’으로 떠오른다는 것. 리얼리얼 측은 “X세대가 주로 내놓는 펜디 바게트, 티파니 팔찌, 루이비통 멀티컬러백 등을 구입하는 것은 MZ세대”라고 했다.

일본 도쿄 오모테산도의 빈티지 명품숍 아모레를 찾은 고객이 쇼핑에 나서고 있다. 사진=정희원 기자

일본에서는 이미 중고 명품 거래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해당 분야의 전문 기업들은 온라인숍 운영은 물론 번화가에 오프라인 부티크 매장을 운영하기도 한다. 럭셔리 플래그숍 못잖은 인테리어로 고객모시기에 나서는 중이다.

 

직장인 C씨(32)는 “2017년부터 일본을 찾으면 오모테산도 등의 빈티지 명품숍을 찾아 쇼핑을 즐겼다”며 “원하는 과거의 모델들을 찾기 좋았고, 희소 아이템을 좋은 컨디션에, 국내보다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었다. 당시만 해도 굳이 중고로까지 명품을 사야 하는 것 아니냐는 반응이었는데, 이제는 확실히 달라진 것을 느낀다”고 했다.

 

국내 사정은 비슷하다. 중고거래 플랫폼에 물건을 많이 내놓는 주부 D씨(47)는 이같은 중고명품백이 활발히 팔리는 현상이 신기하고 재밌다. 그는 “20년 전 즐겨 들던 명품 브랜드와 10년 전 인기있던 속칭 ‘잇백’ 등이 다시 유행하는 것 같다”며 “다만 우리 세대는 중고제품을 쓰는 데 ‘남이 쓰던 걸 굳이 살 필요가 있을까’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최근 내놓은 제품을 사는 20~30대들은 전혀 거리낌이 없는 것 같다”고 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중고명품 매력은 ‘힙하고 저렴하니까’… 오픈런에 환멸

 

패션업계 관계자는 “MZ세대가 중고 명품 구매에 빠지는 배경으로 Y2K 패션의 재림, 지속가능성 소비에 대한 인식변화, 오래된 것에서 멋을 찾는 문화를 들 수 있다”며 “어중간한 패션 브랜드보다는 명품 브랜드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진 분위기도 중고 명품시장을 성장시키는 원동력”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와 함께 현실적인 문제도 영향을 미친다고 했다. ‘샤넬백 1000만원 시대’에 접어든 만큼, 신상을 소비할 여력이 부족한 것도 한 원인이다. 결국 주머니사정을 고려해 중고명품을 찾는 경우도 많다는 것. 

 

이뿐 아니라 취향이 다양해지며 자신이 좋아하는 디자이너의 옛 작품을 찾기 위해 중고 명품 시장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도 적잖다.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는 “중고 시장의 성장을 주도하고 있는 MZ세대는 어릴 때부터 많은 브랜드와 상품에 노출된 자본주의 키즈”라며 “새로운 것을 사도 결국 중고가 된다는 것을 알고 굳이 비싸게 값을 치러야 하는 신상에 집착하지 않는다”고 분석한 바 있다.

 

◆국내 럭셔리쇼핑 플랫폼, ‘중고거래’ 강화

 

이같은 상황에 국내 럭셔리쇼핑 플랫폼들도 중고 제품 판매에 뛰어들고 있다. 캐치패션은 최근 ‘중고 명품 매입 서비스’를 시작했다. 사용하지 않는 명품을 되팔고 판매금액의 10%를 캐치포인트로 추가 적립받을 수 있다.

 

트렌비가 운영하는 ‘중고 명품 리세일 사업’은 이미 누적 위탁 금액 136억원을 달성하며 25배 가량 성장했다. 트렌비는 지난해 1월 정식 서비스 오픈 이후 9월까지 약 9개월 만에 월 거래액 20억 원을 돌파했다.

 

럭셔리 플랫폼이 중고거래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이슈는 ‘신뢰’다. 자칫 가품을 판매했다간 낭패를 당할 수 있어서다. 캐치패션, 트렌비 등이 각자 검수 서비스에 공을 들이는 이유다. 중고나라도 최근 블록체인 기반 디지털 보증 서비스 업체인 매스어답션과 자사 플랫폼에 등록된 명품 중고거래 상품에 대한 무료 감정 시범 서비스를 도입했다.

 

happy1@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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