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 한 번의 눈빛과 한 줄기 호흡으로 관객의 감정을 건드리는 배우가 있다. 넷플릭스 영화 ‘계시록’ 속 형사 연희 역의 신현빈이 그렇다. 죄책감과 트라우마에 짓눌린 인물을 절제된 에너지로 그려낸 그의 연기는, 작품의 음울하고 무거운 정서에 설득력을 더하며 긴 여운을 남긴다. 물속 깊이 잠긴 것 같은 인물이다. 과장 대신 섬세함으로, 감정의 물결을 미세한 진폭으로 표현한 배우 신현빈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트라우마에 짓눌린 사람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고민이 컸다. 연희는 화를 내고 싶어도 여력이 없는 인물이다. 표현이 억눌려 있으면서도, 감정은 분명히 전달돼야 했다.”
연희의 내면은, 영화 전체의 공기처럼 무겁고도 차분하다. 그래서 신현빈은 “표현이 이질적으로 튀어 보이지 않도록, 발산하는 캐릭터들 사이에서 밸런스를 맞추는 데 집중했다”고 말했다.“죄책감을 해소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죄책감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다. 양래를 찾아간 것도 단죄보다는 감시와 의심에 가까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죽을 만큼 힘든 사람이, 그럼에도 누군가를 죽이지 않고 다른 선택을 하는 게 이 인물의 핵심이 아닐까”라고 전했다.

신현빈은 연희라는 인물이 만들어가는 내적 변화에 주목했다. 극 중 이연희는 동생의 죽음 이후, 삶의 감각을 잃은 채 살아간다. 사건이 벌어진 동네로 이사를 오고, 유일하게 의심이 가는 권양래를 쫓는다. “연희에게 동생을 죽게 만든 권양래를 향한 증오는 모든 것보다 앞선 가치이자 하나의 믿음이다. 이런 믿음은 아영이의 실종 사건을 마주하면서 조금씩 변해가고 그를 미약하게나마 극복하는 성장으로 사건을 해결한다. 연희는 흔들리는 믿음을 그냥 강화하는 게 아니라, 다른 선택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봤다. 그게 민찬(류준열)과 가장 다른 지점이지 않을까.”
외형적으로도 무너진 삶을 표현하는 데 공을 들였다. 분장팀과 함께 주근깨, 퀭한 피부, 메이크업을 거의 하지 않는 설정을 만든 신현빈은 “일단 외형으로는 누가 봐도 정말 상태가 안 좋다고 느낄 정도의 얼굴과 몸을 만들려고 했다”며 “얼굴이 얼룩덜룩해 보일 정도로, 절망 속에서 감정이 스며드는 느낌을 원했다”고 했다. “이전에는 메이크업을 거의 하지 않는 작품은 해봤지만, 이렇게까지 분장으로 피폐함을 드러내는 건 처음이었다”란다.
작품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약 5분 30초 동안 이어지는 롱테이크 클라이맥스 장면이다. 권양래, 민찬, 연희가 다시 마주하는 순간, 감정이 한 번에 폭발한다. 원래는 컷을 나눠 촬영하려 했지만, 현장에서 리허설을 해보니 “할 수 있을 것 같더라”고 했다.
“춤추듯이 타이밍이 맞아야 한다. 연기뿐 아니라, 사운드, 조명, 카메라가 다 함께 움직여야 하니까. 같이 해냈다는 동지애가 있다. 에너지가 몰입돼 있었고, 같이 걷는 느낌이 났다”며 새로운 도전을 해낸 당시를 설명했다.

신현빈이 말하는 연희는, ‘마지못해 사는 사람’이었다. 약이 없으면 일상을 유지할 수 없고, 퇴색한 감정과 공허한 눈빛으로 하루하루를 버티는 인물. 그 삶을 연기하며 느낀 것은 ‘트라우마를 극복하려는 사람이라기보다는, 버티는 사람’이었다고.
“마지막에 아영이를 찾는 장면에서 많이 울었어요. 극장에서 보는데 부끄럽게도, 화면 속 제 얼굴이 눈물콧물이더라. 다행히 그 장면을 '진정성이 있다'면서 좋게 봐주신 분들이 많다고 해서 위안이 됐다(웃음).”
‘계시록’이 던지는 질문, ‘내가 믿는 믿음이 과연 나만의 것인가?’는 신현빈에게도 오래 남았다. “확증편향처럼,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건 아닐까”라는 물음은, 작품이 끝나고도 관객의 뒷덜미를 잡는다.
관객 반응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계시록 요약짤’. “세 명 다 미친 거 아냐?”라는 밈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그런 말이 영화에도 나오잖나. ‘이 동네 왜 이렇게 미친 사람이 많냐’고. 웃긴데 맞는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