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의 퇴직연금 개편이 급물살을 탄 가운데 퇴직연금 선진국으로 꼽히는 네덜란드와 호주의 사례를 주목하고 있다. 퇴직연금의 80% 이상이 예금과 보험 등 원리금 보장형 상품에 방치된 한국과 달리, 기금형 제도를 운영하고 있는 두 나라의 퇴직연금은 자본시장 발전에 일조했을 뿐 아니라 이 나라 국민의 확실한 은퇴 후 소득보장 수단으로 꼽히고 있다. 퇴직연금 운용 투명성과 경쟁에 따른 수익률 향상, 수탁자 책임 강화 등의 이점을 국내 상황에 맞게 참고해야 한다는 분석이다.
22일 국민연금연구원의 퇴직연금의 유형화 및 유형별 퇴직연금제도 비교 분석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네덜란드는 유럽에서 확정급여형(DB) 기반의 기금형 제도가 가장 발달한 나라다. ‘노사 공동 책임-준(準) 의무가입’ 모델로 산업별 노사 단체협약을 기반으로 운영하고 있으며, 대기금 설립을 의무화해 수급권을 보호하는 등 연대의 가치를 유지하는 것이 특징이다. 최근 10년간 연평균 6~8% 수익률을 올렸다. 중앙은행이 감독하고, 운용 회사가 기금형태로 연금을 운용해 상대적으로 높은 수익률을 유지하고, 일시금 수령을 금지하고 있다.
과거에는 확정급여(DB)형 비중이 높았으나, 2023년부터 집합적 확정기여(CDC)형으로 전환하고 있다. CDC는 확정기여형(DC) 제도의 지속가능성을 가지면서도 기금을 공동으로 운용하고 위험을 함께 분담하며 개인이 직접 상품을 고르지 않고 기금이 운용 전략과 포트폴리오를 짠다.
호주도 기금형 퇴직연금을 운용 중이다. 가입자가 연금자산을 전문으로 운용하는 기금과 개별 연금상품을 선택할 수 있다. 가입자가 별도의 상품을 설정하지 않을 경우 투자 경험이 적은 가입자에게 적합하게 설계된 단일 디폴트옵션 ‘마이수퍼(Mysuper)’에 자동 가입하도록 정했다. 대신 가입자가 원하면 언제든지 디폴트옵션 상품이 아닌 다른 상품을 스스로 골라서 투자할 수 있다. 근로자가 선택할 수 있는 기금은 회사가 설립한 기업형기금, 특정 산업별로 조성된 산업형기금, 정부기관 공무원과 공공기관 근로자 대상의 공적기금 등으로 다양하다. 기금 간 무한 경쟁 시스템으로 가입자는 기금을 자유롭게 바꿀 수 있다. 기금 수익률 등 통계는 매년 투명하게 공개되며, 성과가 좋지 못한 기금은 다른 펀드에 흡수된다.
국민연금연구원은 한국 퇴직연금의 낮은 연금화율과 노후소득보장 기능 미비를 지적하며, 네덜란드의 CDC 방식으로 재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보고서를 통해 “네덜란드는 DC로 전환하면서도 수급권 보호를 위해 연대기금 설립을 의무화하고, 연금 수급을 원칙으로 하되 일시금 수급은 10% 이내로 제한하는 등 노후소득보장 기능을 지키려는 노력을 병행하고 있다”며 “반면 호주는 디폴트옵션 등을 통해 시장을 활성화하지만,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지우고 종신 연금화율이 낮으며 DC에 대한 직접적인 수급권 보호 장치가 거의 없어 노후소득보장 기능에 한계가 뚜렷하다”고 분석했다.
이어 “퇴직연금에 대한 국가의 인식이 제도의 성격을 결정한다”며 “우리나라도 퇴직연금을 노후소득보장제도로 명확히 인식하고 장기적인 발전 방향을 새롭게 설계해야 할 때”라고 제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