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정상 간 협상에서 3500억달러(약 498조원) 규모의 대미 투자 합의가 이뤄지며 한국 경제가 한 고비를 넘겼다는 평가가 나온다. 정부가 제시한 ‘연간 200억달러(약 28조5000억원)’ 투자 한도를 지켜내면서 외환시장 충격 우려도 완화됐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지난 29일 경북 경주 APEC 미디어센터에서 브리핑을 통해 이번 협상 세부 결과를 발표했다. 협상은 ▲현금 투자 2000억달러(약 284조6000억원) ▲조선업 협력사업 ‘마스가 프로젝트’ 1500억달러(약 213조4500억원) 등 두 축으로 구성됐다.
현금 투자는 연간 200억달러 한도 내에서 단계적으로 이뤄진다. 외환시장 불안이 예상될 경우 납입 시기와 금액을 조정할 수 있는 조항도 포함됐다. 투자 약정 기간은 2029년 1월까지다.
김 실장은 “외환시장에 직접적인 충격이 발생하지 않도록 납입 조정 근거를 마련했다”며 “실제 조달이 장기간 분산돼 외환시장 부담은 제한적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도 이날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정부가 외환시장 영향을 최소화한 선에서 잘된 협상을 이끌었다”며 “150억~200억달러 범위는 시장이 감내할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정부는 이번 투자 재원을 외환보유액 운용수익으로 충당한다는 방침이다. 김 실장은 “외화자산 운용에서 발생하는 이자·배당 수익으로 대부분 충당이 가능하다”며 “국내 외환시장 자금으로 직접 조달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9월 말 기준 외환보유액은 4220억달러(약 601조원)이며, 이 중 유가증권 규모는 3784억달러다. 연 5.3% 수준의 운용수익을 거둘 경우 연간 200억달러 조달이 가능하다.
한국투자공사는 운용자산 2276억달러에서 연간 수익률 11.73%를 기록 중으로, 이를 근거로 정부는 외환수익 활용이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다만 수익이 부족할 경우 정부보증채를 해외시장에서 발행할 계획이다.
이번 합의에는 투자 원리금 보장을 위한 안전장치도 포함됐다. 양국은 상업적 타당성이 있는 프로젝트에만 투자하며, 원리금 상환 전까지 수익을 5대5로 나누기로 했다. 김 실장은 “이익배분 비율은 아쉬운 부분이 있었지만, 수익성이 낮은 분야에 대한 강제 투자를 피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했다.
관세 부문에서도 일정한 성과를 거뒀다. 미국은 한국산 자동차에 부과하던 관세를 25%에서 15%로 낮추기로 합의했다. 이는 일본과 동일한 수준이다. 반도체 역시 주요 경쟁국인 대만보다 불리하지 않도록 조정됐다.
전문가들은 이번 협상을 “최소 방어에 성공한 결과”로 평가했다. 장용준 경희대 무역학과 교수는 “우리 측 요구가 대체로 관철된 것으로 보인다”며 “경쟁국 대비 불리하지 않은 조건을 확보했다는 점이 의미 있다”고 말했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실장은 “올해 성장률에는 큰 변화가 없겠지만, 내년엔 무역 불확실성이 완화돼 성장률 상향 요인이 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외환시장 반응도 즉각 나타났다. 이날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협상 타결 소식이 전해진 오후 7시 무렵 급락해 7시30분 기준 1419.6원으로 마감했다. 오후 1시 최고점(1,435.7원) 대비 16.1원 하락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외환보유액 운용수익을 매년 30조원 가까이 해외 투자에 투입할 경우 장기적 외환 여력과 GDP 구성항목인 투자 부문에 영향이 불가피하다는 지적도 있다. 국내 설비투자 여력이 줄어드는 부작용이 발생할 가능성도 존재한다는 게 일부 전문가들의 우려다.
정희원 기자 happy1@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