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대표 완성차 업체 기아가 어느덧 80돌을 맞았다. 기아는 1944년 창립 이래 두 차례 부도와 자동차 산업 통폐합조치 등 시련과 역경 이겨내고 2020년대 모빌리티 산업 선도하는 메이커로 도약하는 기적을 보여줬다.
기아의 모태는 김철호 창업자가 1944년 12월 기술입국과 산업보국의 정신으로 창립한 ‘경성정공’이다. 김 창업자는 창립 연설에서 “가난을 추방하고 자주 국가를 세우는 길은 기계공업을 발달시켜 공업화를 실천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경성정공은 1952년 ‘기아산업’으로 간판을 바꿔달았다. “아시아에서 일어난다(起亞)”는 뜻을 담았다.
기아산업은 한국전쟁(1950년 6월~53년 7월) 기간인 1952년 피란수도 부산에서 최초의 국산 자전거 ‘3000리호’ 생산했다. 당시 김 창업자는 “자전거가 완성되면 자동차, 자동차가 완성되면 비행기를 만들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하지만 1960년 자전거 사업 적자로 첫 부도를 맞았다. 하지만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기아산업은 신제품 개발 의지를 꺾지 않았다. 1962년 최초의 국산 오토바이 ‘C-100’, 최초의 국산 삼륜차 ‘기아마스타 K-360’ 각각 출시했다. 오토바이는 1960년대 당시 좁은 도로환경과 열악한 연료 사정에 알맞은 이동수단으로 자리매김했고, 삼륜차는 이 시기 대한민국 물류 발전의 원동력이 됐다.
김철호 사장 체제에서 기아산업은 은행관리를 받는 가운데에서도 두 바퀴 오토바이와 세 바퀴 삼륜차를 국내 최초로 개발한 데 이어 네 바퀴 자동차까지 진출하며 자동차 공업의 ‘기술자립’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기아산업은 1973년 국내 최초의 종합자동차 공장인 소하리공장 준공하며 전환점을 마련했다. 소하리공장에선 1974년부터 첫 승용차 ‘브리사 S-1000’ 생산. 일본 마쓰다의 패밀리아의 면허생산(라이선스) 모델이었지만, 출시 2년 뒤인 1976년 국산화율을 89.5%까지 끌어올렸다. 특히 일제 엔진을 국산화해 경쟁 차종(현대자동차 포니, GM코리아 카미나) 대비 기술자립 측면에서 차별화했다.
1980년대 들어 자동차 산업 통폐합조치로 기아산업은 승용차 사업에서 강제 철수하게 됐다. 상용차 생산만 가능했던 시기에 기아산업은 마쓰다의 ‘봉고’를 면허생산하며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다. 다목적 승합차 봉고는 가족단위 고객뿐 아니라 중소기업, 상공업자 등 다양한 계층에서 호응을 얻으며 출시 3년 만인 1984년 5월 누적판매대수 10만 대를 돌파했다.
봉고 신화 덕분에 기아산업의 경영 역시 눈에 띄게 개선됐다. 1981년 순손실 266억원에서 그 이듬해인 1982년에는 순이익 39억원, 83년에는 순이익 291억원을 기록했다.
이후 기아산업은 1987년 2월 수출전략형 소형차 ‘프라이드’ 출시하며 승용차 시장에 복귀했다. 프라이드는 일본 마쓰다의 소형차 설계능력과 기아산업의 생산력, 포드의 전 세계 판매망이 결합한 ‘월드카’였다.
기아산업은 1990년 3월 자동차 전문기업으로의 입지를 공고히 하고자 ‘기아자동차’로 사명을 변경한다. 1992년 9월 기아 브랜드 최초의 고유모델 ‘세피아’, 한 해 뒤인 1993년 7월에는 세계 최초로 도심형 SUV ‘스포티지’를 각각 출시해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1990년대 ‘소유-경영 분리 모범기업’으로 평가받던 기아차는 1997년 7월 ‘부도유예’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게 됐다. 책임경영 및 명확한 오너십의 부재, 수년간 이어져온 분식회계, 무리한 사업확장과 외부의 경영권 공세 등이 겹치며 창사 이래 최대 위기에 몰렸다.
채권단은 기아차에 대한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를 신청했고, 1998년 4월 법정관리를 개시했다. 법원 결정에 따라 기업청산 또는 존속의 갈림길에 선 기아차는 생존을 위해 1998년 6월 국제입찰로 인수자 찾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정주영 창업회장의 결단에 정몽구 명예회장의 실행력을 더한 옛 현대그룹이 1998년 12월 1일 기아자동차 인수계약 체결했다. 이로써 기아는 현대라는 새로운 울타리에 합류하게 됐다.
현대가에 합류한 이후 회사 경영은 차츰 안정화됐고, 위기의 순간마다 분발하는 기아인 특유의 DNA 역시 빛을 발하기 시작. 1999년 카렌스·카니발·카스타 등 ‘쓰리(3) 카 효과’ 앞세워 현대차가 인수한 지 1년 만에 흑자 전환했다. 2000년 2월에는 법정관리에서 벗어났다.
기아차가 22개월 만에 법정관리를 벗어난 주요 요인으로는 ▲현대와의 시너지를 이끌어낸 최고경영층의 강력한 리더십 ▲레저용차량(RV) 신차의 적기개발 ▲임직원 자구노력 및 강도높은 구조조정 등을 꼽을 수 있다. 특히 정몽구 회장은 카니발(미국명 세도나)의 품질을 3시간여 직접 체크하는 등 ‘품질 최우선주의’를 몸소 실천했다.
정몽구 회장은 기아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기 위해 정의선 당시 부사장을 2004년 말 인사에서 기아차 대표이사 사장으로 승진 내정함. 정의선 대표이사 체제에서 ▲기반 상실(Homeless) ▲차별성 상실(Edgeless) ▲의욕 상실(Spiritless) 등 3-less로 회사의 실상을 진단했다. 3-less를 해결하기 위해 기아차는 2006년 독일 출신 세계적 디자이너 피터 슈라이어를 영입했다. 이듬해인 2007년 본격화한 ‘디자인 경영’은 자동차 디자인의 혁신뿐 아니라 조직문화 개선에 이르기까지 기아 고유의 철학과 정체성을 새롭게 설계했다.
디자인 경영과 함께 기아차는 해외 생산거점 확보에도 나섰다. 유럽 생산거점으로 슬로바키아 질리나를 선정하고, 2004년 2월 첫 해외 단독 생산법인 설립했다. 2006년 10월에는 미국 조지아 공장 기공식을 개최. 조지아 공장에선 훗날 K 시리즈의 대표 차종 ‘K5’를 양산하며 미국 시장 점유율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디자인 경영의 결실이라 할 수 있는 K 시리즈는 2009년부터 출시했다. 준대형 K7을 시작으로 중형 K5와 소형 K3, 대형 K9 등 세단 라인업을 개편했다. 호랑이 코를 닮은 라디에이터 그릴, C필러를 지나쳐 트렁크까지 이어지는 크롬라인 등 획기적인 디자인으로 글로벌 시장에서 호평을 받았다. 글로벌 자동차 시장에서 기아의 브랜드 위상을 드높였다.
2014년부터 3년간 ‘300만 대 판매’를 달성한 이후에는 고속성장의 후유증을 겪기도 했다. 구형 모델 위주로 판매했던 중국에서의 부진이 대표적이었다.
성장 정체를 해결하기 위해 기아차는 다시 한 번 변화를 시도했다. 본사 위주의 경영방식에서 벗어나고자 2018년 6월 권역본부 도입을 발표했다. 미주와 유럽 등 각각의 권역본부가 스스로 권한과 책임을 행사하는 구조로 전환했다. 2019년부터는 인도 아난타푸르 공장에서 소형 SUV ‘셀토스’를 생산하며 인구 13억 시장에 안착했다.
자동차 산업의 대전환기를 맞은 2020년대 들어 기아차는 또다시 도전과 혁신을 꾀했다. 2021년 1월 15일 사명을 기아자동차에서 ‘기아’로 변경했다. 단순히 회사 이름뿐 아니라 로고, 슬로건, 브랜드 컬러 등 기업 이미지(CI) 전반을 개편했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 상황에서도 과감하게 ‘기아 대변혁(Kia Total Transformation)’의 첫 발을 뗐다. 특히 새 슬로건 ‘영감을 주는 움직임(Movement that inspires)’은 2륜 오토바이부터 3륜차, 4륜 승용차까지 80년 가까이 모빌리티 산업에만 전념했던 기아 스스로에 대한 헌사(tribute)이기도 했다.
사명 변경과 함께 친환경 미래 모빌리티 위주로 사업구조 재편도 시행했다. 전기차(EV)는 플래그십 차종인 EV6·EV9뿐 아니라 대중화 모델 EV3, EV4, EV5까지 확장하며 캐즘(일시적 수요 위축)을 넘어서고자했다. 이용자(user) 수요에 기반한 맞춤형 전기차 목적기반모빌리티(PBV)는 1980년대 다목적 차량 봉고의 헤리티지를 잇는 측면이었다. 운전자의 용도에 맞게 사람도 나르고 짐도 실었던 그 당시 봉고의 소명을 전동화와 디지털 시대에 맞춰 PBV가 확대 계승했다.
기아는 관계자는 “지난 80여년의 역사를 근간삼아 앞으로도 글로벌 모빌리티 시장에서 이동의 본질적 가치를 구현하고, 혁신에 앞장설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정인 기자 lji2018@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