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전 아일랜드 더블린을 여행할 때였다. 낮엔 거의 보이지 않던 노숙자들이 밤이 되자 곳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 중 한 명은 큰 개와 함께였다. 한 행인이 반려견용 간식 캔을 적선했고 그 홈리스는 땡큐를 연발하며 받아든 그것을 곧장 깠다. 개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는 노숙자의 눈빛이 지금도 생생하다.
최근 유기견들이 주인공인 창작 뮤지컬 ‘바둑이와 세리’가 이달 초부터 서울 혜화 대학로의 보라아트홀에서 상연 중이라는 보도자료를 받았다. 김재환 작가의 애니메이션 시나리오를 봉만대 감독이 뮤지컬로 연출했다고. 반려동물산업·문화를 담당하는 기자 입장에서 신기하고 반가웠다. 시간을 내서 꼭 봐야지 하다가 23일 극장을 찾았다.
반려인은 매표소에서 반려동물과 찍은 사진을 보며주면 50% 할인가에 표를 구매할 수 있었다. 받아든 티켓 뒷면에는 입양을 기다리는 유기견의 사진과 이름 등 정보 외에도 유기견을 돌보는 보호소 ‘동물사랑 네스트’ 인스타그램 계정으로 연결되는 QR코드가 있었다.
봉만대 연출의 환영 인사 직후 작품의 막이 올랐다. 배우들이 분한 개는 모두 10마리인데 이중 오늘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의미의 반려견, 그러니까 집안에서 키워진 개는 한 마리뿐이다. 주인공 ‘세리(여정윤 분, 주요 배우는 더블캐스팅으로 이하 출연진 표기는 23일 기준)’인데 그마저도 병이 들자 집에서 쫓겨나 유기된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주인공 ‘바둑이(신성하 분)’와 그 친구들 ‘도꾸(김영신 역)’와 ‘검둥개(성석현 분)’는 집은 있지만 실외의 개집이고 평소 자유롭게 동네를 활보한다. 각자 견주로부터 반려견으로서 케어는 받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할매(정애연 분)’는 번식장의 모견으로 학대 받다 버려진 것으로 표현되고, ‘셰퍼트(류창우 분)’와 ‘도베르만(이한솔 분)’은 군견, ‘체 개바라(정애연 분)’와 ‘치와와(구현소 분)’, ‘닥슌(김다 분)’은 산 속에서 들개화된 유기견으로 예상된다. 할매와 체 개바라의 배우가 같은 이유는 작품을 통해 알 수 있다.
줄거리는 우연히 세리를 만난 바둑이·도꾸·검둥개가 세리가 ‘유기’된 것이 아니라 ‘유실’됐을 가능성에 기대어 봉천동에서 청계산을 넘어 개포동으로 향하는 모험이다. 그리고 청계산에 과천 동물원에서 탈출한 ‘늑대(전재성 분)’가 숨어들어 주인공들의 모험이 더욱 험난해진 상황이다.
뮤지컬답게 발라드, 랩, 힙합 등 다양한 장르의 노래를 들을 수 있었고 하이라이트 구간에서 단체 군무도 인상적이었다. 도베르만의 발톱과 앉는 자세의 디테일 역시 눈에 띄었다. 관객들의 참여 구간도 꽤 있어서 좋았다. 90분 간의 작품이 끝나자 배우진과 무대에서 단체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는 기회도 주어졌다.
내용과 작품성과는 별개로 작품을 보고 듣는 내내 가슴에 큰 돌 하나가 얹힌 듯 마음이 불편했다. 우리는 오래 함께한 반려견이 아프다고, 그래서 동물병원 치료비가 많이 든다는 이유로 유기하는 ‘인간’이니까. 버려진 들개들이 “멸종시키자”고 울부짖는 대상인 ‘인간’이니까.
실제로 이 작품을 보러 온 이들 중에 반려동물을 유기한 적 있거나 학대한 적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기본적으로 반려동물에 호의를 품고 그래서 유기동물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직접 유기동물을 입양한 이도 꽤 있다는 걸 관람평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매년 유기동물 발생률이 줄지 않는 현실 아래, 결국엔 똑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에 죄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둑이와 세리’는 티켓 한 장당 1000원이 유기동물을 위해 기부된다. 제작진과 배우들도 유기동물 인식 개선 캠페인 ‘끝까지함개’를 전개한다. 이 작품이 극장에서 끝나는 것이 아닌 유기동물의 안타까운 현실에 변화가 생기는 시작점이 되길 바라는 의도일 테다.
다만 이 작품을 계기로 단기간에 유기동물을 입양하는 이들이 늘어나길 바라지도 않는다. 유기동물을 향한 안타까운 마음이 그들의 입양으로 곧장 이어지길 바라지 않는다는 의미다. 반려동물을 데려온다는 건 앞으로 그 반려동물과 함께 ‘늑대가 있는 청계산을 넘는 일’을 자주 겪어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바둑이와 세리를 보고 유기동물을 입양하고 싶어진 관객이라면 일단 그 마음을 스스로 반려(返戾)했으면 좋겠다. 바둑이가 그런 것처럼 세리와 끝까지 함께할 수 있을지, 더블린의 홈리스처럼 노숙을 하는 현실에서 반려견과 함께할 수 있을지 스스로 의심하길 바란다는 뜻이다.
유기동물을 입양하는 것도 용기지만, 자신이 반려동물을 끝까지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맞나를 의심하는 것이 더 큰 용기일지 모른다.
‘바둑이와 세리’는 다음달 8일까지 상연된다. 화~금 저녁 8시. 토일공휴일 오후 2시·오후 6시.
박재림 기자 jamie@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