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템 보호를 위한 AI 도입보다 해커들이 AI 역량을 확보하는 속도가 더 빠르다.”
최근 해커의 공격을 받고 막대한 피해를 본 세계 최대 가상자산 거래소 플랫폼 ‘바이낸스’의 창업자 자오창펑 전 바이낸스 CEO의 말이다. 그는 4일 가상화폐 전문매체 코인데스크와 인터뷰에서 인공지능(AI) 기술 발전으로 가상화폐 거래소와 은행을 겨냥한 사이버 공격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했다.
앞서 바이낸스는 지난달 29일 해킹을 당해 역대 단일 최대인 63억 달러(약 8조4000억원) 상당의 가상화폐와 스테이블 코인 등을 빼앗겼다. 미국 연방수사국 FBI은 이 사건의 배후로 북한 정찰총국 산하 정예 해커 조직인 ‘트레이더트레이터’를 지목했다. 바이낸스가 이날 공개한 조사 보고서를 보면 그 해커들은 악성 소프트웨어 공급망 공격에 더해 사내 AI 도구를 악용해 공격을 펼쳤다.
자오창펑 창업자는 “AI발 사이버 위협이 가상화폐 업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면서 “가상화폐 거래소가 해킹당할 정도라면 은행은 더 위험한 상황에 부닥친 것이라 생각한다”고 우려했다.
우리나라 금융권도 지난달 북한 소행으로 추정되는 연쇄 사이버 공격에 시달렸다. 주요 은행을 포함한 금융기관들과 빗썸을 비롯한 일부 가상자산 거래소들의 네트워크가 잇달아 뚫렸다. 10만 명 넘는 고객 개인 정보가 유출되는 등 실제 국민 피해가 컸다.
미국 보안업체 크라우드스트라이크는 국내 금융기관을 겨냥한 공격에 AI 기반 침투테스트 도구인 ‘아르텍스’가 활용됐다고 밝혔다. 아르텍스는 대형언어모델(LLM)을 연결해 보안 취약점을 탐색하고 침투 경로를 계획하며 관련 명령을 실행하는 AI 에이전트 도구로, 보안 점검을 목적으로 개발됐지만 해커가 악용할 수 있다.
크라우드스트라이크는 “이번 사례가 AI 도구를 이용하면 한 명의 공격자도 짧은 시간에 여러 조직을 침해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고 전했다. 공격자가 일일이 취약점을 탐색하고 침투 절차를 준비하는 대신 AI를 활용해 일부 작업을 자동화함으로써 공격에 필요한 시간과 인력을 줄일 수 있다는 것.
마이크로소프트(MS)도 북한의 정예 해킹 조직들이 최고 수준의 AI 활용 기술을 갖췄다고 평가했다. MS 위협 인텔리전스가 지난달 29일 공개한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 해킹 조직 8곳 가운데 3곳은 AI를 일상적인 공격 업무에 통합한 단계에 도달했다. 특히 그 중 한 조직 올해 8∼9월 한국 이용자를 겨냥한 맞춤형 피싱 유인 문서를 100개 이상 생성했으며, 수분 만에 수십 개의 문서를 제작한 정황도 확인됐다.
이처럼 해커들이 AI 도구를 활용하고 공격 경로를 바꿔가며 침입을 시도하는 동안 금융회사들은 이를 제때 탐지하고 차단하는 데 한계를 드러냈다. 일부 금융회사는 보안 취약점을 제때 보완하지 않거나 외부 시스템에 대한 접근 권한조차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금융회사의 외부 연결 시스템과 보안관제체계를 전반적으로 손질하기로 했다. 금융위는 금융회사 전산시스템이 외부와 연결되는 모든 접점을 목록으로 관리하고, 각 시스템에 대한 접근 권한을 엄격하게 통제하도록 할 계획이다.
아울러 금융회사별로 확보한 위협정보를 신속하게 공유할 수 있도록 관제체계를 개선하고 AI 기반 취약점 점검 인프라를 구축하는 방안도 추진한다. 특히 중소형 금융회사를 위해 AI 기반 공동 보안관제 시스템을 구축하는 방안도 검토하기로 했다.
국정원도 전 중앙부처와 지자체 등 2천100여개 기관에 체크리스트를 기반으로 자체 보안점검을 실시하도록 요청하는 동시에 공공부문 주요 정보통신기반시설 중 정보시스템을 대상으로 인터넷 접점에 대한 취약점 점검을 직접 실시하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국민의 일상은 물론 국가 경제와 안보에 심대한 영향을 주는 수준으로까지 확대된 사이버 보안 위기에 맞서 종합적인 예방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며 “공공과 민간 영역을 아우르는 범정부 차원의 대책기구 설치 논의도 필요하다. 강력하고 실효적인 ‘사이버 보안 차르’ 기구 구성을 적극 검토해달라”고 주문했다.
박재림 기자 jamie@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