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드뱅크의 개념은 1980년대 미국 저축대부조합(S&Ls·Savings&Loans) 파산 위기 때 처음으로 도입됐다. 미국 최대 저축대부조합이던 아메리칸세이빙스뱅크(ASB)는 1970년대 경기 호황을 타고 주택담보대출을 크게 늘렸다가 1980년대 부동산 가격이 급락하면서 대규모 부실을 떠안게 됐다. ASB의 자본 잠식 규모는 당시 총자산(300억달러)의 10%가량인 30억달러에 달했다. 결국 1988년 미국 예금보험공사(FDIC)와 사모펀드인 텍사스퍼시픽그룹이 구원투수로 등장해 부실자산과 고비용 부채를 배드뱅크로 이관해 성공적으로 구조조정을 마무리했다.
1990년 전후 유럽의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등이 경쟁적인 대출 확대의 후폭풍으로 대량의 부실대출과 예금인출 사태가 발생하자 일부 금융회사를 국유화하고 배드뱅크를 도입해 위기를 극복한 사례도 있다.
중국에는 1999년 처음 배드뱅크가 들어섰다. 부실자산 정리라는 목적에서 벗어나 부동산 및 증권거래, 국외 고수익 대출 등의 다양한 사업에 관여하는 은행으로 변모했다. 사실상 주주출자 은행의 부실자산을 감추고 수익을 추구하는 용도로 활용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후 배드뱅크 관련 논의는 글로벌 금융위기를 계기로 다시 급부상했다.
자영업자 부채 문제 해결을 위한 구조적인 수단으로도 주목받는 우리나라와 달리 해외 배드뱅크는 주로 금융사의 기업 여신에서 발생한 대규모 부실자산을 처분해 금융사의 건전성을 제고하는 목적으로 활용된다. 특히 채무자의 자구노력이 전혀 없는 방식의 대규모 부채탕감 정책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 파산법(챕터 7,13)은 채무자가 일정 자산을 처분하고, 소득이 있으면 일부라도 분할상환 계획을 제출해야 면책이 가능하다. 유럽 역시 일정 기간의 상환노력(3~5년간 소득 일부 납입)과 법원의 엄격한 심사를 거쳐야 부채 탕감을 해준다.
미국의 개인채무조정은 2022년 바이든 정부 당시 4500만명의 학자금 대출 부담을 줄이기 위해 파산 개혁법을 추진했다. 1976년 파산 시 학자융자금 빚 청산을 금지한 이래로 47년 만이었다. 연 소득 12만5000달러 이하인 개인은 기본적으로 대출금 1만달러 면제 혜택을 받고, 차상위계층으로 분류돼 연방정부 장학금을 받고 있는 경우 1만달러가 더 탕감됐다. 연방대법원에서 제동을 걸었지만 바이든 정부는 정책을 강행했고, 이후 총 400만명이 1460억달러의 대출금을 면제 받았다.
아일랜드는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의 영향으로 2010년 국제통화기금(IMF), 유럽중앙은행(ECB), 유럽연합(EU)으로부터 850억유로(약 109조원)의 구제금융을 받는 처지가 되자 심각한 채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엄격한 파산법을 제정했다. 1인당 한 달 음식비로 247유로, 난방비 57유로로 제한했으며, 휴일도 반납하게했다. 생활 수준에 대한 정량화된 지침을 내놓은 것이다. 장기주택담보채권도 정부가 관리해 최소 10만명의 채무를 해결하는 등 아일랜드는 강력한 긴축 재정과 구조조정을 감행해 불과 3년 만인 2013년 12월 구제금융에서 벗어났다.
현정민 기자 mine04@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