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와 여당이 추진 중인 3차 상법 개정안은 자사주 취득 후 1년 내 의무 소각을 골자로 한다. 주주 권리 강화, 투명성 제고, 경영진 사익 추구 견제를 중심으로 한국 기업지배구조 전반을 재설계하겠다는 정치권 의지가 반영돼 국내 자본시장의 지각변동을 예고하고 있다. 특히 투자자에게는 ‘주주 환원 확대’라는 확실한 호재이지만, 기업 입장에서는 ‘경영권 방어 수단 부재’라는 치명적인 리스크가 발생할 수 있다는 의견으로 갈리고 있다.
자사주 소각 의무화는 현재 기업 경영진에게 “회삿돈(자사주)으로 경영권을 방어하던 관행을 끝내고, 경영권을 지키려면 본인의 돈으로 지분을 늘리라”는 강력한 압박으로 작용하고 있다.
기업들은 신주인수선택권이나 차등의결권 같은 서구식 경영권 방어 장치가 없기 때문에 그동안 자사주를 일종의 ‘비상금’처럼 활용해왔다. 경영권 분쟁이 발생하면 보유 중인 자사주를 매각하는 방식으로 대주주는 자신의 돈을 한 푼도 쓰지 않고도 우호 지분을 늘려 경영권을 방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사주 소각이 의무화되면 이러한 상황에서 꺼내 쓸 수 있는 자사주라는 비상금이 사라지게 된다. 이는 사실상 자사주를 전략적으로 활용할 수 없게 만든다. 즉 대주주가 자사주를 통한 지배력을 강화와 기업 사유화를 막겠다는 취지다.
기업들은 이를 두고 “갑옷을 벗기고 전쟁터로 내모는 격”이라며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대한상공회의소는 “기업 경영 활동을 위축시키고 자본시장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달 자기주식을 10% 이상 보유한 104개 상장사를 대상으로 ‘자기주식 소각 의무화 관련 기업 의견 조사’를 실시한 결과 응답 기업의 62.5%가 소각 의무화에 반대했다고 밝혔다. ‘중립적 입장’은 22.8%, ‘도입에 찬성한다’는 14.7%에 그쳤다.
대주주는 지금까지는 회삿돈으로 자사주를 사서 경영권 방어에 활용했다면, 앞으로는 경영권을 지키기 위해 대주주가 직접 사재를 털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자금력이 부족한 기업에는 치명적인 위협이 될 수 있다. 또한 방어 수단이 사라진 기업은 행동주의 펀드나 적대적 인수합병(M&A) 세력의 공격에 취약해질 수 있다. 경영진이 장기적인 연구개발(R&D) 투자보다는 당장의 경영권 방어를 위해 현금을 쌓아두거나 단기 주가 부양에만 매몰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반면 주주 환원 관점에서는 ‘코리아 디스카운트(국내 증시 저평가)’ 해소의 핵심 열쇠로 꼽히고 있다. 자사주를 소각하면 전체 발행 주식 수가 줄어들어 기업의 이익이 그대로라도 1주당 순이익(EPS)과 자기자본이익률(ROE)이 올라 주가 상승을 견인할 수 있게 된다.
외국인 투자자들이 국내 증시를 저평가하는 주된 이유 중 하나가 ‘회사가 돈을 벌어도 주주에게 돌려주지 않고 자사주 형태로 쌓아두며 대주주를 위해서만 쓴다’는 점이었다. 향후 자사주 매입 후 소각이 의무화되면 시장 전체의 밸류에이션을 높여, 대주주에게 집중됐던 기업의 가치를 소액주주를 포함한 전체 시장 참여자에게 골고루 분배하는 거시적인 효과를 가져온다. 또한 경영진은 경영권을 지키기 위해 인위적인 방어막에 의존하는 대신 실질적인 실적 개선과 주가 부양을 통해 주주들의 지지를 얻어야 하며, 이는 장기적으로 투자자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박종렬 흥국증권 연구원은 “배당성향 상향, 비핵심자산 매각, ESG 공시 강화 등이 주주친화정책 확산을 뒷받침하며 기관투자자 중심의 거버넌스 평가 투자가 본격화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설태현 DB증권 연구원은 “자사주 소각의 가치는 단순한 회계 조정분이 아니라 자본 구조의 질적 개선 및 경영진의 행동 변화를 강제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라며 “자사주 비중이 높은 보험, 증권, 에너지, 부동산 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현정민 기자 mine04@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