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중은행의 유언대용신탁 잔액이 올해 들어 3조원 넘게 불어났다. 그간 상속이 임박한 일부 고액 자산가를 중심으로 활용되던 신탁이 생전 자산관리와 사후 안전한 승계를 동시에 설계하려는 대중적 수요와 맞물리며 금융권의 새로운 격전지로 떠올랐다.
5일 금융권에 따르면 KB국민·신한·하나·우리은행 등 4대 시중은행의 유언대용신탁 잔액은 지난 8월 말 기준 7조6581억원으로 집계됐다. 지난해 말 4조5002억원에서 불과 8개월 만에 3조1579억원(70.2%) 급증했다.
신탁법 제59조에 법적 근거를 둔 유언대용신탁은 고객이 생전에 금융회사와 계약을 맺고 재산을 맡긴 뒤, 사후에 미리 지정한 수익자에게 재산이 넘어가도록 설계하는 금융상품이다. 유언장 공증 대비 법적 효력이 명확하고 집행이 신속하다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그동안은 수억원에 달하는 가입 기준 탓에 일반 금융소비자가 접근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최근 은행권이 가입 문턱을 대폭 낮추고 치매 돌봄 기능까지 결합한 맞춤형 상품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
◆문턱 낮추고 간편해진 ‘유언대용신탁’…1000만원이면 가능
그동안 유언대용신탁은 최소 가입 금액이 통상 3억~5억원, 많게는 10억원 이상으로 부유층의 전유물로 여겨졌다. 복잡한 법률 자문과 세무 검토가 수반되는 데다 초기 수수료 부담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시중은행들은 가입 기준을 1000만원선으로 파격 인하한 소액 특화 라인업을 선보이며 진입 장벽을 허물었다.
KB국민은행은 기존 10억원이던 ‘KB위대한유산신탁’의 최소 가입 금액을 1000만원(만 40세 이상)으로 대폭 낮춘 간편형 라인업을 내놨다. 우리은행 역시 가입 문턱을 기존 5000만원에서 1000만원으로 인하하고 심사 절차를 간소화한 ‘우리내리사랑 안심신탁’을 통해 시니어 고객층 공략에 나섰다. 하나은행은 ‘하나 리빙트러스트’ 브랜드를 앞세워 소액 간편형 신탁을 강화하고 비대면 가입 시스템을 고도화했다.
소액 유언대용신탁의 핵심 실익은 ‘유산 상속 분쟁의 사전 차단’이다. 피상속인이 사망할 경우 상속인 전원의 동의나 복잡한 유산 분할 합의 절차가 필요한 일반 상속과 달리 신탁은 사전에 지정된 계약 내용에 따라 지정된 비율과 방식대로 즉시 자산이 이전된다. 살아있는 동안에는 원금이나 수익을 생활비로 인출해 쓰다가, 사후에는 일시금뿐 아니라 ‘매월 분할 지급’이나 ‘특정 연령 도달 시 지급’ 등 유연한 조건부 승계가 가능하다.
◆‘치매·돌봄 공백’ 메우는 안심신탁…병원비 직불·간병비 자동 결제 시스템
신탁은 이제 ‘생전 돌봄’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다. 인지기능 저하나 치매에 대비하는 ‘치매안심신탁(후견지원신탁)’이 대표적이다. 과거에는 고령자가 치매 등으로 판단 능력을 상실하면 법원의 성년후견제도를 거쳐야 해 시간과 비용 부담이 컸고, 가족 간 갈등도 잦았다.
신한은행의 ‘신한 SOL메이트 유언대용신탁·치매안심신탁’과 주요 은행들의 케어형 신탁은 이러한 사각지대를 정조준했다. 정상적인 판단이 가능한 시점에 자산을 신탁해두면 평상시에는 자유롭게 관리하다가, 향후 치매 진단 등 인지장애 이벤트가 발생했을 때 자금 집행 체계가 자동으로 전환된다.
특히 주목받는 부분은 ‘지정 직불 서비스’다. 병원비나 간병비 지출 증빙이 은행에 접수되면, 은행이 해당 기관 계좌로 직접 대금을 송금한다. 사전에 지정한 전용 결제 카드로 월 한도 내에서만 결제되도록 통제하는 기능도 지원된다. 가족이나 간병인에 의한 자금 유용 리스크를 차단하고, 노후 자금이 본인의 치료와 돌봄에만 쓰이도록 안전장치를 걸어둔 셈이다.
신탁 문턱이 낮아진 만큼 가입 전 상품 구조와 부수 비용을 면밀히 살펴야 한다. 신탁 자산은 위탁자의 고유재산과 분리돼 법적 압류나 강제집행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받는다. 다만 정기예금과 달리 연 0.2~0.5% 안팎의 신탁보수가 매년 지속 차감된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현정민 기자 mine04@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