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가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가운데 공적연금을 보완해 국민 노후소득을 뒷받침할 퇴직연금 제도의 전면적인 개편이 시급하다는 제언이 나왔다. 독립적 지배구조를 갖춘 ‘기금형’ 도입과 함께 기존 계약형 운용의 혁신이 동시에 추진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7일 자본시장연구원이 전날 발표한 ‘초고령사회 다층노후소득을 위한 퇴직연금제도 개편’ 보고서에 따르면 2025년 말 국내 퇴직연금 적립금은 501조4000억원으로 최근 5년간 2배 가까이 급증했다. 사업자 업권별로는 은행업 점유율이 52.0%로 시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나, 최근 실적배당상품 수요 증가와 함께 증권업 점유율이 26.2%까지 빠르게 확대되는 등 머니무브가 본격화되고 있다. 특히 실적배당형 비중이 44.3%에 달하는 개인형퇴직연금(IRP)의 경우 증권업이 35.5%까지 치솟아 은행권을 위협하고 있다.
문제는 적립금의 75.4%가 여전히 원리금보장상품에 묶여 있다는 점이다. 사용자가 운용 책임을 지는 확정급여형(DB)의 경우 원리금보장 비중이 91.9%에 달하며, 10년 연평균 수익률은 2.64%(원리금보장형 2.11%)에 불과해 물가상승률을 감안하면 실질 자산 증식에 실패하고 있다. 사전지정운용제도(디폴트옵션) 역시 적립금 53.3조 원 중 85.4%가 원리금 중심인 안정형에 편중돼 연간 수익률이 3.69%에 그쳤다.
남재우 선임연구위원은 보고서에서 “세대 간 부양을 전제로 하는 부과방식 공적연금만으로는 인구 오너스 시대의 적정 노후소득을 보장하기 어렵다”며 “적립 방식 사적연금인 퇴직연금을 다층연금체계의 핵심 축으로 재정립해야 한다”고 진단했다.
이어 “현행 금융사 중심의 계약형 체계가 지닌 한계를 극복하려면 근로자 중심의 독립적 수탁법인이 대규모 적립금을 전문 운용하는 ‘기금형 퇴직연금’ 도입이 필수적이다. 노사정 합의에 따른 비영리 연합형, 금융기관 개방형, 공공형 등 3개 유형은 각자의 제도 목적에 맞게 맞춤형으로 설계돼야 한다”고 제언했다.
또한 “금융기관 개방형은 전문 운용역량과 건전한 경쟁을 통한 장기수익률 제고를, 공공형은 취약계층 근로자의 사각지대 해소와 수급권 보호를 최우선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최근 거론되는 국민연금공단의 퇴직연금 위탁운용 참여에 대해서는 “운용 목적과 허용 위험 등 자산·부채 속성이 전혀 다른 기금을 통합 운용한다는 발상 자체가 비현실적”이라며 “공공이 민간 일임운용 시장에 개입할 명분이 부족할 뿐 아니라 민간 시장을 구축(crowding-out)하는 부작용만 초래하므로 참여를 엄격히 배제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기금형 도입 이후에도 시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할 계약형 퇴직연금의 효율화 방안도 제시했다. DB형은 적립금운용계획서(IPS) 실질화와 자산부채관리(ALM) 기반의 일임형 OCIO 허용을 촉구했고, DC형은 100% 원리금보장형을 적격상품 승인에서 배제하고 비선택자의 자산이 자동으로 분산투자 포트폴리오로 넘어가도록 ‘옵트아웃(opt-out)’ 방식으로 전면 개편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마지막으로 남 연구위원은 “운용체계 개편과 중도 누수 차단이 병행되면 현재 13% 수준에 그친 퇴직연금 소득대체율을 20~30%대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며 “금융기관 역시 단순한 상품 판매사에서 벗어나 실질적인 운용 책임을 지는 수탁기관으로 전환해 장기 자산배분과 위험관리 역량을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정민 기자 mine04@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