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성의 金錢史]크라수스의 영악한 재테크

경매·비리로 떼돈 벌어…재산 노린 허위신고도 수두룩
거부 이룬 뒤 명예 추구…무리한 전쟁으로 파멸

크라수스는 경매, 비리 등 영악한 수단으로 로마 제일의 부를 쌓아올렸다 . 그러나 지나친 탐욕이 그의 수명을 재촉하게 된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로마 역사상 제일의 갑부로 유명하다. 그것도 상상을 뛰어넘는, 세계 역사를 통틀어서도 순위권 안에 들어가는 수준이다.

크라수스의 재산 총액은 로마 화폐로 1억7040만 세스테르티우스에 달했다. 당시 로마의 1년 예산이 2억 세스테르티우스던 시절이다. 크라수스의 재산은 국가 예산의 9할에 가까운 셈이다.

현대 대한민국의 재벌 오너들은 발뒤꿈치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포브스지는 크라수스의 재산을 현재 화폐로 환산할 경우 총 1698억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계산했으며, ‘역사상 가장 부유한 75인’ 중 8위에 선정했다. 

그런데 크라수스는 이토록 거대한 재산을 어떻게 모았을까?

대부분의 부자들이 그렇듯 그도 깨끗하게 돈을 번 것은 아니었다. 아니, 그의 재테크 방식은 영악하다 못해 교활하고 비열했다. 당대에 꽤 비도덕적인 상류층조차 크라수스는 혐오할 정도였다.

◆경매·비리로 재산 형성 

크라수스는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였다. 그의 집안은 전대부터 넓은 농장과 은광을 소유하고 있는 등 부유한 가문이었다. 하지만 크라수스가 생전에 쌓아올린 재산은 그보다 훨씬 더 많았다.

그가 큰 돈을 번 가장 주요한 수단은 경매와 비리였다.

당시 로마는 원로원파와 민중파로 갈라져 치열한 내전 중이었는데 크라수스는 원로원파의 영수인 술라 휘하였다. 내전이 술라의 승리로 끝나자 자연스럽게 민중파는 모두 역적으로 규정됐다.

술라는 반대파를 역적으로 몰고 살생부를 작성해 몰살한 것은 물론 그들의 재산까지 몰수하도록 지시했다. 몰수된 재산은 경매에 부쳐졌는데 크라수스는 여기서 부동산, 귀금속 등을 헐값에 사들여 엄청난 이득을 남겼다.

그뿐이 아니었다. 크라수스뿐 아니라 여러 원로원파 인사들이 경매로 떼돈을 벌었는데 ‘돈맛’을 본 그들은 나중에는 단지 재산을 탐내 죄 없는 사람들까지 마구 고발했다. 그런 허위신고에 가장 앞장 선 사람이 크라수스였다.

크라수스 등의 행패가 얼마나 극심했던지 훗날 카이사르가 원로원 연설에서 “욕심에 눈 먼 자들이 재산을 탐내 죄 없는 자들의 이름으로 술라의 살생부를 가득 채웠다”며 “이런 현상은 술라의 부하들이 돈방석 위에 앉은 뒤에야 겨우 진정됐다”고 비난할 정도였다. 민중파 정치가인 카이사르의 비난에 원로원파조차 반박하지 못했다.

또한 크라수스는 돈을 벌기 위해 비리도 서슴치 않았는데, 대표적으로 꼽히는 만행이 소방관 매수였다.

당시 로마에서는 불이 나면, 소방관보다 크라수스의 부하가 먼저 달려오기로 유명했다. 크라수스의 부하는 소방관에게 돈을 찔러줘 소화 작업을 일부러 느리게 진행하도록 만들고 그 옆에서 애타 하는 집 주인과 매매 협상을 했던 것이다.

절망한 집 주인들이 주택을 싸게 넘기면 크라수스는 그것을 개축해 임대사업을 영위했다. 주로 로마에서 ‘인술라’라고 불리는, 한 건물에 여러 가구가 거주하는 서민형 임대주택을 만들곤 했다.

그밖에도 크라수스는 돈을 벌기 위해 온갖 부정과 비리를 동원했다. 대개의 부자들이 그렇듯 돈으로 정치가들을 유혹해 자신에게 유리한 정책을 만들도록 하는 건 흔한 일이었다.

크라수스는 또한 고리대금업과 노예를 통한 사업에도 능해서 자신의 재주를 종종 자랑하곤 했다. 하지만 그로 인한 영향은 별로 크지 않았다. 그를 로마 역사상 제일의 갑부로 만들어 준 결정적인 원인은 경매와 비리였다. 

◆무리한 명예 추구하다 자멸

이런 짓을 하니 크라수스에게 인망이 쏠릴 리 없다. 평범한 로마 시민들은 물론, 정치적으로는 동지인 원로원파 인사들마저 크라수스를 경멸했다.

그래도 원로원 의원인 데다 워낙 재산이 많아서 중요 인사로는 대접을 받았다.

크라수스는 당시 기사 계급, 요즘으로 치면 재계의 영수로 활동했다. 로마 최고의 관직인 집정관을 두 번이나 역임했으며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등과 함께 ‘삼두 정치’의 일원이 되기도 했다.

그쯤에서 만족했으면 아마 행복한 여생을 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크라수스는 분수를 모르는 욕심을 부렸다.

사람이 돈을 번 뒤에는 명예를 추구한다고 하던가? 크라수스도 카이사르나 폼페이우스처럼 눈부신 실적을 쌓아 빛나는 명예를 얻고 싶었다.

명예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린 크라수스는 그들 못지않은 군사적인 업적을 올려 명성을 드높이려고 나섰다.

그는 두 번째 집정관 재임 후 시리아 총독을 자원해 동방으로 갔다. 이어 단지 군사적인 업적을 올릴 목적으로 당시 로마와 사이가 나쁘지 않던 파르티아에 일부러 시비를 걸어 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단지 총사령관의 탐욕을 위해 벌어지는 전쟁에 열과 성을 다할 장병들은 없다. 게다가 크라수스는 전쟁 준비 기간 동안 시리아 속주 내 신전들의 보물을 빼앗아 사욕을 채우는 등 전쟁의 승리보다 약탈에 더 눈을 번득였다.

그가 굳이 동방으로 와 파르티아에 싸움을 건 것도 동방의 부를 약탈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속내가 뻔히 보이기에 장병들은 모두 진저리를 쳤다.

이런 총사령관이 싸움에서 이길 리 없으리라. 크라수스는 파르티아의 주력 부대도 아닌, 유력 귀족 수레나스의 사병들에게 참패했다. 단 한 번의 전투로 와해된 로마군은 도망치기에만 바빴다.

나아가 살아남은 장병들은 크라수스에 대한 불신과 혐오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태반의 병사들이 크라수스를 버리고 이리저리 도망쳤다.

남은 병사들도 수레나스가 강화 협상을 제안하자 크라수스에게 협상장에 나가라고 압박했다. 크라수스가 틀림없이 함정이라고 역설했지만 아무도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거절할 경우 하극상도 서슴치 않을 듯한 병사들의 험악한 분위기에 내몰린 크라수스는 할 수 없이 수레나스를 만나러 갔다. 다만 역시 함정이었다. 복병의 습격을 받은 그는 그 자리에서 살해된다.

지나친 탐욕과 분수를 모르는 명예욕이 불러온 최후였다. 

안재성 기자 seilen78@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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