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성의 金錢史]임진왜란 야기한 이와미 은광·회취법

일본, 전세계 은 1/3 생산…활발한 국제무역으로 경제력 향상
토요토미, 우수한 경제력·숙련된 군대 앞세워 조선 침공

전국시대의 일본 장군. 일본은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단련된 군사력과 은 생산량 증가 덕에 향상된 경제력을 바탕으로 조선을 침공했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서기 1592년부터 1598년까지 7년 동안 치러진 임진왜란은 조선에 큰 상처를 안겼다. 전 국토가 폐허화하고, 수십만의 인명이 살상됐다. 국왕은 수도를 버리고 북쪽 끝 의주까지 피난 갔으며 백성들은 왜군뿐 아니라 명군의 약탈에까지 시달려야 했다.

임진왜란의 원인에 대해 여러 가지 분석이 존재하지만 일본의 독특한 정치적 상황과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지나친 야망 때문이라는 설이 주류다.

다만 토요토미가 아무리 야심가라고 해도 힘이 없이는 외국을 침공할 수 없다. 조선을 정복할 수 있다는 토요토미의 판단은 결과적으로는 오판이었지만, 그 실현 가능성을 믿은 기저에는 일본의 숙련된 군대와 우수한 경제력에 대한 신뢰가 깔려 있었다.

16세기 후반에 이미 일본의 경제력은 조선을 크게 능가하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의 경제를 상승시킨 원동력은 이와미 은광 개발과 회취법의 도입에 의해 폭발적으로 증가한 은 생산력이었다.

◇은 생산 증가로 활발한 국제무역 영위한 일본

1526년 일본의 이와미에서 은광이 개발됐다. 이와미 은광은 볼리비아의 포토시 은광과 맞먹을 정도로 엄청난 매장량을 자랑하는 전설적인 은광이었다.

또 1533년에는 새로운 은 제련법인 회취법이 도입됐다. 회취법은 금, 은, 납 등의 합금을 산화분위기 속에서 용해해 납을 산화납 스래그로 분리 제거하고 금은을 회수하는 방법이다. 회취법이 시행되면서 은이 섞인 광물에서 순은을 분리하는 효율이 크게 상승했다.

이와미 은광의 개발과 회취법 도입으로 일본의 은 생산량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17세기 초반에는 일본의 연간 은 생산량이 약 4만 킬로그램에 달할 정도였다. 이는 당시 전세계 은 생산량의 3분의 1에 달하는 거대한 물량이다.

특히 당시 은은 국제통화였다. 국가의 은 보유량이 많다는 것은 요즘으로 치면 외환보유고가 풍부하다는 뜻이다.

덕분에 일본은 넘쳐흐르는 은을 바탕으로 조선, 중국, 포르투갈 등과 활발한 국제무역을 전개했다. 이를 통해 일본의 상공업이 발달하면서 일본의 경제력은 기하급수적으로 향상됐다.

부유해진 상인 계급은 국제무역항으로 번성한 사카이항을 다이묘들의 지배로부터 떨어뜨려 일종의 자유도시로 만들 만큼 막강했다. 그밖에 높은 이익률에 눈독을 들인 여러 다이묘들도 앞다퉈 상업에 뛰어들었다.

오다 노부나가는 사카이항을 정복함으로써 얻은 경제력을 바탕으로 수많은 다이묘들이 난립하던 전국시대의 일본을 사실상 통일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특히 이 시기 아시아 시장 개척에 적극적인 포르투갈로부터 유명한 조총을 수입했다. 사카이항 등을 통해 쏟아져 들어온 조총은 일본의 전투 양상을 뒤바꿔 버린다.

전국시대 후반까지만 해도 일본군의 주력은 중무장 기병이었다. 그러나 전국시대 말기 오다가 조총병과 창병을 조합한 전술을 개발하면서 전장의 흐름이 바뀌었다. 천민 출신 조총병과 창병 앞에서 귀족 출신 중무장 기병들이 낙엽처럼 굴러 떨어졌다.

후일 임진왜란에서도 일본의 조총병과 창병 조합 전술은 조선군에게 큰 충격을 가했다. 탄금대 전투에서 신립은 기병력의 우위를 믿고 정면대결에 나섰으나 창병의 방어력과 조총병의 화력 조합에 밀려 전멸에 가까운 대패를 당했다.

◇경제력의 우위 믿고 조선 침공한 토요토미

본래 오다의 부하였던 토요토미는 오다가 암살된 뒤 그 세력을 물려받았다. 토요토미는 일본의 통일을 완성하고 전국시대를 끝맺었다. 그는 관백의 지위에 올라 일본의 최고 권력자로 군림했다.

하지만 토요토미는 미나모토 요리토모나 아시카가 타카우지처럼 자신의 막부를 설립하고 쇼군이 될 수 없었다. 이는 혈통을 절대시하는 일본의 독특한 정치적 상황에서 유인한다.

가마쿠라 막부 이래 일본은 교토의 국왕이 상징적인 국가원수직을 맡고 실질적인 통치는 막부의 쇼군이 담당한다는 이원 체제를 유지했다. 다만 최고 권력자라고 해서 아무나 쇼군이 될 수는 없었다.

쇼군이 되려면 반드시 귀족 출신이면서 왕족의 피가 섞여 있어야 했다. 즉, 일왕 가문과 혼사를 나눌 정도로 유력한 귀족만 쇼군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지방 다이묘도 아닌, 한낱 천민 출신에 불과한 토요토미가 일왕 가문과 연관이 있을 리 없다. 일본을 통일하고도 막부를 설립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에 비관한 토요토미는 궁리 끝에 더 큰 공을, 아무도 자신의 쇼군 등극을 반대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공을 세워야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즉, 조선 점령이었다.

역사서에 가만히 기다리면 조선 왕이 스스로 항복해올 것이라는 쓰시마섬 다이묘의 아첨을 토요토미가 믿었다가 거짓으로 판명나자 분노해서 조선 침공을 명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토요토미는 오다의 부하이던 시절부터 뛰어난 실무가로, 특히 우수한 경제 정책으로 유명했다. 오다가 한낱 천민에 불과한 토요토미를 키워준 것은 그가 한겨울에 자신의 신발을 품에 안아 녹여줄 만큼 아부를 잘해서가 아니라 그 빼어난 실무능력에 눈독을 들여서였다.

그만큼 경제와 국제 정세에 밝은 토요토미가 조선 왕이 자신에게 항복할 것이라고 믿었을 리가 없다. “조선 왕이 항복하지 않으니 무력으로 그 죄를 물어야 한다”는 선언은 단지 부하들을 조선 침공에 몰아넣기 위한 명분일 따름이었다.

대신 토요토미는 풍부한 은과 활발한 국제무역으로 향상된 일본의 경제력이 상공업을 천시해 후진적인 조선보다 훨씬 앞선다고 판단했다. 또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수많은 전투로 단련된 일본군이 오랜 평화에 찌들어 훈련도가 극히 떨어지는 조선군을 양과 질에서 모두 압도한다고 확신했다.

토요토미의 이런 분석은 사실 틀리진 않았다. 일본군은 임진왜란 발발 첫 해에 수도 한양을 점령하는 등 조선 국토 대부분을 휩쓸었다.

만약 명나라가 5만명의 원군을 파견하는 등 신속히 조선을 구원하지 않았더라면, 이순신이 전라도 해안을 장악해 일본군의 보급로를 끊지 않았더라면,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조선은 정말로 멸망했을지도 모른다.    

안재성 기자 seilen78@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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