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비즈=오현승 기자] 은행업이 한 단계 더 도약하려면 은행과 빅테크(Big Tech : 대형 정보기술 기업) 또는 핀테크 기업과의 규제 장벽이 해소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금융업 중 가장 보수적인 업태임을 고려하더라도 ‘기울어진 운동장’을 시급히 바로잡아야 생산적 경쟁과 혁신을 유도할 수 있다는 게 은행권의 입장이다. 시장원리를 무시한 은행권을 향한 정치권의 간섭도 개선이 시급한 과제로 거론된다.
우선 지나치게 깐깐한 은행업 부수업무 규정이 금융혁신을 가로막는 요인으로 꼽힌다. 은행법 제27조의2는 채무의 보증, 상호부금, 팩토링, 보소예수 지자체 금고대행 등을 은행의 부수업무 운영범위로 규정하고 있는데 은행들은 이를 네거티브(포괄주의) 방식으로 바꿔야 한다고 강조한다. 물론 은행업 부수업무에 포함되지 않은 사업이라도 금융위원회로부터 혁신금융서비스로 지정받으면 최대 4년 간의 특례기간 동안 사업을 영위할 수는 있다. KB국민은행의 금융·통신 융합 알뜰폰 서비스 ‘리브엠’이나 신한은행의 음식 중개 플랫폼 ‘땡겨요’ 등이 이에 해당한다. 다만 이 같은 한시적 조처가 서비스의 영속성을 보장할 순 없다는 게 한계다. 현 제도는 금융사의 혁신서비스 도입을 위축시키고 서비스 중단 시 이용자의 불편을 키우는 구조란 얘기다.
은행이 보유할 수 있는 비금융 스타트업 지분이 최대 15%에 불과한 점도 은행들의 적극적 투자를 가로막는다. 또 금융산업의 구조개선에 관한 법률상 금융회사가 비금융회사의 지분을 20% 이상 취득하려면 금융위의 승인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점도 지나치게 경직된 규제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빅테크에 견줘 은행권의 규제 수준이 지나치게 까다롭다”면서 “금융소비자의 편의성 제고를 위해 은행과 빅테크가 선의의 경쟁을 펼치려면 업권 간 동등한 규제 수준이 적용돼야 한다”고 말했다.
최근 금융업권 안팎의 화두인 마이데이터 서비스와 관련해선 대면 채널로도 서비스를 허용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현재 가이드라인 상 비대면 채널에 한해서만 마이데이터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데, 이러한 제약사항 탓에 고령층 등 디지털금융 소외계층은 마이데이터 서비스에서 배제될 공산이 크다. 한 시중은행의 마이데이터 담당 임원은 “비대면 채널은 충분한 설명뿐 아니라 위험에 대한 이해 여부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한계가 있다”면서 “소비자가 마이데이터 서비스를 제대로 이해하고 동의해 이용할 수 있게 하려면 안정적인 상담채널인 은행 영업점 창구를 활용할 수 있도록 운영 방침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금융산업의 경쟁력을 해치는 건 규제뿐만이 아니다. 시장원리를 벗어난 정부의 과도한 개입은 금융업의 본질을 훼손시킨다. 새 정부의 은행 예대금리차 공시제 도입 움직임은 반시장적 정책의 대표적 사례다. 현재 은행들은 대출종류별 대출금리, 기준금리, 가산금리, 가감조정금리 등을 신용등급별로 나눠 은행연합회 등에 공시하고 있다. 인수위원회 측에선 이를 보다 촘촘히 공시토록 해 금융소비자들의 합리적 선택을 돕겠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이 같은 정책이 효과를 낼지는 미지수다. 자칫 은행들로 하여금 대출금리가 낮은 고신용자 또는 기업대출 위주의 영업을 강제하는 역효과를 낼 수 있어서다. 중금리 대출시장 위축을 불러와 중저신용자가 제2금융권으로 내몰릴 수도 있다. 특히 은행권은 금융당국이 은행 금리산정에 직접 개입하는 상황도 우려한다. 앞서 송언석 국민의힘 의원이 지난 1월 대표발의한 ‘은행법 일부개정법률안’엔 은행의 예대금리차가 증가하는 경우 금융위가 은행 금리 산정의 합리성과 적절성을 검토해 필요한 경우 개선 등의 조치를 권고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 담겼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금융당국이 인위적으로 예대금리차를 조정한다면 시장 내 경장자체가 무의미해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 소상공인·자영업자 부실대출 처리를 위한 ‘배드뱅크(부실채권전담은행)’ 설립 논의, 청년층 금융소비자 대상 고금리 수신 상품 출시 등도 정부의 포퓰리즘성 정책에 들러리를 서는 구조라며 은행권은 반발하고 있다.
한시적으로 배당성향을 제한했던 금융당국의 권고 조치를 두고서도 은행권의 불만은 여전하다. 금융위는 지난해 1월 코로나19 대응 차원에서 손실흡수능력을 유지·제고할 수 있도록 국내 은행지주회사 및 은행의 배당을 한시적으로 순이익의 20% 이내에서 실시하라고 권고했다. 이에 따라 스트레스 테스트를 통과한 신한금융지주를 제외한 주요 금융지주사들은 배당성향을 20%로 확정했다. 4대 금융지주의 한 관계자는 “당국의 배당제한 조치로 금융주의 주가가 부정적인 영향을 받게 되면 그 책임은 고스란히 경영진들과 구성원들이 짊어져야 한다”며 “코로나19라는 특수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상장회사의 대표적 주주환원정책 중 하나인 배당성향을 강제하는 건 반시장적 조처”라고 말했다. 4대 금융지주의 2021 회계연도 평균 배당성향은 코로나19 이전 수준인 25.7%을 회복했다.
한편 전국은행연합회는 은행권의 요구사항을 취합해 이달 중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제출할 예정이다. 은행법상 은행의 부수업무에 가상자산업을 추가하는 내용을 비롯해 방카슈랑스 판매상품 제한 및 판매비율 상향 규제 완화 등의 내용도 담길 예정이다. 박종규 금융연구원장은 금융위 정책과제 발굴을 위한 연구기관 간담회에서 “금융산업이 장기적으로 발전하려면 규제 차 해소를 통한 공정한 경쟁 환경 조성이 중요하다”며 “그 과정에서 금융혁신이 저해되지 않도록 당국의 균형있는 접근이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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