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령화 사회로 진입한 우리나라에서는 금융권이 고령층 자산관리의 핵심으로 부상하고 있다. 과거에는 가족이 도맡았던 노부모의 부양과 상속 문제가 이제는 신탁이라는 제도적 장치를 통해 은행과 보험사에서 관리하는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금융권은 치매 인구 100만명 시대를 맞아 유언대용신탁과 치매신탁 상품 개발에 사활을 걸고 있으며, 관련 시장 규모 역시 최근 5년간 폭발적인 성장세를 기록했다. 하지만 이러한 성장 이면에는 높은 비용 장벽과 가입 시기의 한계라는 명암이 공존하고 있다.
유언대용신탁은 고객(위탁자)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금융사가 자산을 굴려 수익을 지급하고, 고객 사망 후에는 미리 지정한 계약에 따라 배우자나 자녀 등에게 자산을 분배하는 상품이다. 여기에 특약 형태로 결합되거나 단독으로 판매되는 치매신탁은 가입자가 치매로 인해 판단 능력이 흐려질 경우 병원비나 요양비 등 생활 자금을 안정적으로 받을 수 있도록 설계됐다.
28일 금융권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말 기준 5대 시중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의 유언대용신탁 누적 잔액은 2021년 1조3800억원 대비 3배 이상 급증한 4조4100억원 규모로 집계됐으며, 올해 상반기 내 5조원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된다. 최근에는 보험업계까지 이 시장에 가세하며 단순한 현금 자산 관리를 넘어 간병 서비스나 장례 지원 서비스와 연계된 하이브리드형 신탁 상품들을 출시하고 있다.
각 은행의 대표 상품들도 뚜렷한 색깔을 내고 있다. 하나은행의 ‘봉안플랜신탁’은 법률·세무 전문가 조직을 앞세워 상속 집행부터 유품 정리까지 원스톱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KB국민은행의 ‘KB위대한유산 신탁’은 반려동물 부양 특약 등 세밀한 라이프 스타일을 반영하며 자산가들의 호응을 얻고 있으며, 신한은행의 ‘S라이프케어’는 전용 모바일 앱을 통한 자산 현황 조회와 요양시설 입소 연계 서비스로 차별화를 꾀했다.
이러한 신탁 상품들이 주목 받는 이유는 ‘생전 자산관리’와 ‘사후 분쟁 예방’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산가들 사이에서는 자녀들의 소위 ‘조건부 효도’를 방지하고 자신의 노후 자금을 끝까지 본인을 위해 쓰겠다는 인식이 확산됐다. 또한 유언장 작성의 까다로운 법적 요건을 거치지 않고도 신탁 계약을 통해 유류분 분쟁을 일정 부분 방지하거나 원하는 방식대로 재산을 물려줄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실제로 최근 법원이 유언대용신탁 자산도 유류분 반환 대상에 포함될 수 있다는 취지의 판결을 내놓기도 했으나, 여전히 복잡한 상속 집행 과정을 금융기관이 대행해준다는 편의성은 강력한 유인책이 되고 있다.
하지만 신탁 시장의 양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일반 대중에게는 여전히 진입 장벽이 높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가장 큰 장벽은 비용과 복잡성이다. 통상적으로 유언대용신탁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현금성 자산이나 부동산이 필요하며, 가입비와 연간 관리보수 등 수수료 부담도 만만치 않다. 은행들이 대중화를 위해 최소 가입 금액을 낮춘 상품을 내놓고는 있지만, 자산 규모가 작을 경우 수수료를 떼고 나면 실질적인 자산 증식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운 구조다. 또한 신탁 계약서는 법률 용어가 난무하고 구조가 복잡해 금융 이해도가 낮은 고령층이 내용을 완벽히 이해하고 가입하기 어렵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더욱 치명적인 한계는 이 상품들이 ‘사전 준비 금융’이라는 점이다. 치매신탁의 본질은 치매가 오기 전 정신이 온전할 때 계약을 맺어야 효력이 발생한다는 데 있다. 막상 치매 진단을 받고 인지 능력이 저하된 이후에는 본인 의사로 신탁 계약을 체결하는 것이 법적으로 불가능하다. 이 경우 성년후견인 제도를 이용해야 하지만, 절차가 복잡하고 시간이 오래 걸려 골든타임을 놓치는 경우가 많다.
현정민 기자 mine04@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