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층이 보유한 자산이 동결되거나 금융 사기에 노출되는 이른바 ‘치매머니 리스크’가 현실화되면서, 우리보다 앞서 이 문제를 겪은 일본의 사례가 재조명되고 있다. 일본은 이미 20여 년 전부터 치매를 사회적 과제로 인식하고 제도적 개편에 나섰다. 일본의 성공 요인으로 ▲용어 변경을 통한 인식 개선 ▲지역밀착형 케어 시스템 ▲금융 안전장치(신탁)를 들 수 있다.
일본의 대응은 치매 명칭을 바꾸는 것에서부터 시작됐다. 일본 정부는 2000년 ‘개호보험법(장기요양보험)’을 시행하며 사회적 돌봄의 기틀을 마련한 데 이어 2004년에는 치매의 공식 명칭을 ‘인지증(認知症)’으로 변경했다. ‘어리석다’는 부정적 뉘앙스를 지우고, 누구나 걸릴 수 있는 뇌의 증상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인식 개선은 2005년부터 시작된 ‘치매 서포터’ 양성 사업으로 이어갔다. 특별한 자격증이 아닌 90분 정도의 강좌를 통해 치매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배우고 환자와 가족을 따뜻하게 지켜보는 응원군을 길러내는 캠페인이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일본 전역의 치매 서포터는 수천만명에 달하며, 이들은 은행·마트·관공서 등 사회 곳곳에서 치매 노인의 안전을 지키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일본 치매 케어의 핵심은 시설 격리가 아닌 지역사회 공존이다. 일본은 각 지방자치단체에 지역포괄지원센터를 구축해 고령자가 살던 곳에서 계속 거주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이곳에서는 사회복지사, 간호사 등 전문 인력이 상주하며 치매 초기 상담부터 의료 서비스 연계, 학대 방지 등 종합적인 솔루션을 제공한다. 환자가 지역사회와 단절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목표다. 동네 편의점 직원이 단골 노인의 이상 행동을 감지해 센터에 알리면, 센터가 즉시 개입해 가족과 의료기관을 연결하는 식이다.
가장 눈여겨볼 부분은 금융권의 변화다. 판단력이 흐려진 고령자가 자산을 잃거나, 본인 인증을 할 수 없어 병원비조차 출금하지 못하는 사태를 막기 위해 일본 금융기관들은 일찌감치 가족 신탁 서비스를 도입했다. 가족 신탁은 고령자가 자신의 재산 관리 권한을 신뢰할 수 있는 가족이나 전문가에게 맡기는 제도다. 일본의 주요 은행들은 치매 발병 전 미리 계약을 맺어두면 향후 병원비나 요양비가 필요할 때 대리인이 복잡한 절차 없이 자금을 인출할 수 있는 상품을 대중화했다. 최근에는 인공지능(AI)을 활용해 ATM 이용 패턴이 평소와 다를 경우 거래를 중단하고 가족에게 알리는 기술적 보완장치도 마련했다.
또 다른 나라를 살펴보면 영국은 치매 발병으로 소득이 감소할 경우 기존 소득의 50~70%를 보장해 주는 소득보장보험을, 미국은 보호자가 지역과 업종 등 소비 범위를 사전에 정하고 치매 고객이 원하는 곳에서 카드를 사용할 수 있는 고령자 특화 선불카드를 출시하기도 했다.
반면 우리나라는 노인 인구 1000만 시대를 맞았지만, 여전히 치매 환자 가족들은 독박 간병과 경제적 부담이라는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다. 전문가들은 우리나라 역시 일본처럼 사회적 인프라를 대폭 확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단순히 요양병원을 늘리는 하드웨어적 접근을 넘어 금융권과 지역사회가 유기적으로 결합된 소프트웨어적 해법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현정민 기자 mine04@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