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갈등과 우크라이나 전쟁 등 글로벌 지정학적 긴장이 장기화되고 있지만, 세계 교역은 과거 냉전기와 같은 전면적인 블록화로 단절되지 않고 비교적 안정적인 흐름을 유지하고 있다. 미·중 간 직접 교역이 급감하는 틈새를 베트남, 멕시코, 인도 등 ‘커넥터 국가(Connector Countries)’가 메우며 글로벌 경제연계를 지탱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역시 베트남 등 아세안 생산망을 완충 지대로 삼아 미·중 양대 시장과의 연결을 동시에 확대해 왔지만, 향후 미국의 우회수출 규제 등에 따른 새로운 리스크에 노출될 수 있다는 진단이 나왔다.
한국은행은 13일 발표한 ‘Bok 이슈 : 지정학적 분절 속 글로벌 경제연계는 어떻게 재편되고 있는가’ 보고서에서 유엔(UN) 총회 표결자료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제산업연관표(ICIO)를 통해 글로벌 공급망의 구조적 변화를 분석했다.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커넥터 국가’의 완충 효과
보고서에 따르면 2017년 이후 각국의 외교·정책 성향을 분석한 결과, 대다수 국가는 정치·안보(지정학) 측면에서 미국 쪽으로 뚜렷하게 가까워졌다. 반면 경제·개발(지경학) 측면에서는 각국의 산업구조와 통상 이해관계에 따라 이동 방향이 엇갈리며 정치와 경제가 따로 움직이는 ‘디커플링(탈동조화)’ 현상이 확인됐다.
이러한 현상의 중심에는 베트남, 인도, 멕시코 등 '커넥터 국가'가 있다. 이들 국가는 미국과 안보적 정렬을 강화하면서도 지경학적으로는 중국에 가까운 입장을 유지하거나 중국 쪽으로 더 이동하는 ‘다자 정렬(multi-aligned)’ 성향을 보였다. 특히 단순한 경유 기지에 머물지 않고 현지 생산과 외국인직접투자(FDI)를 흡수하며 실제 핵심 제조 거점으로 도약했다. 2022년 대비 2025년 미·중 간 직접 교역이 약 40% 급감했음에도 글로벌 교역 전체가 위축되지 않고 버틴 배경에는 이들 국가의 중개·완충 기능이 있었다.
한은은 “최근의 지정학적 분절화는 경제적 연계의 전면적인 단절이라기보다는 기존 글로벌 생산네트워크를 바탕으로 교역·투자 경로가 재조정되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韓 반도체·전자 공급망 재편…중국 대신 아세안 경유 급증
한국의 공급망도 이러한 글로벌 재편 흐름에 발맞춰 빠르게 재조정됐다. 2016~2022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제산업연관표를 통해 한국 수출 부가가치의 최종 귀착지를 추적한 결과, 한국의 대(對)베트남 수출 부가가치 중 미국 최종수요로 이어진 비중은 2016년 11.1%에서 2022년 18.5%로 대폭 상승했다. 같은 기간 중국 최종수요와 연결된 비중 역시 7.3%에서 13.9%로 함께 증가했다. 베트남 생산망을 통해 미·중 두 거대 시장 모두와의 연결을 동시에 넓힌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반도체 등 컴퓨터·전자·광학기기 업종에서 가장 극적으로 나타났다. 베트남을 거쳐 미국과 중국 최종수요로 연결된 비중은 각각 21.0%, 19.4%로 뛰었다. 아울러 한국에서 창출된 부가가치가 미국 최종수요로 이어지는 간접경로를 살펴보면, 중국 경유 비중은 10.7%에서 6.8%로 하락한 반면, 아세안 5개국 경유 비중은 4.9%에서 8.3%로 상승했다. 특히 반도체·전자 업종의 경우 2022년 아세안 경유 비중(18.6%)이 중국 경유 비중(17.0%)을 처음으로 추월했다. 한국 기업들이 미국 최종시장에 대한 직접투자를 늘리는 동시에, 베트남 등 아세안 거점을 적극 활용하는 이원화 전략을 펼친 결과다.
◆공급망 회복력 높였지만…美 통상 규제 등 간접 충격 대비해야
한은은 한국이 기존 아세안 생산망을 활용해 미·중 두 시장과의 연결을 유지해 온 점은 지정학적 위기 속에서 생산·수출 경로의 선택지를 넓혀 공급망의 회복력을 높이는 긍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평가했다. 중국과의 연계를 무작정 끊기보다 커넥터 국가를 매개로 충격을 분산해 왔다는 분석이다.
하지만 아세안 생산망 의존도가 높아진 만큼 새로운 통상 리스크도 수반된다. 한은은 “미국 최종수요로 연결되는 한국 부가가치 중 아세안 경유 비중이 커진 만큼, 미국이 향후 원산지 규정 강화나 우회수출 조사 등 공급망 통상 규제를 전방위로 강화할 경우 그 여파가 아세안 현지 공장을 거쳐 국내 기업과 중간재 수요에 직접적인 충격을 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커넥터 국가를 통한 완충 기능을 지혜롭게 활용하되, 주요국의 정책 변화나 현지 여건 변화가 국내로 전이될 가능성을 철저히 모니터링해야 한다"며 "특정 국가나 경로에 편중되지 않도록 공급망을 다변화하는 리스크 관리가 시급하다”고 덧붙였다.
현정민 기자 mine04@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