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율 올라도 쓸 건 쓴다”…과거 급등 겪은 가계 ‘소비 내성’ 생겨

1일 서울 중구 하나은행 딜링룸 전광판에 지수가 표시되고 있다. 뉴시스
1일 서울 중구 하나은행 딜링룸 전광판에 지수가 표시되고 있다. 뉴시스

 

과거 대내외 금융위기 등으로 원·달러 환율 급등을 여러 차례 겪은 가계일수록 고환율 국면에서도 소비를 덜 줄이는 ‘적응(내성)’ 행태를 보인다는 실증 분석 결과가 나왔다. 특히 이러한 경향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노동시장과 자산 형성을 거친 ‘X세대’와 자산 규모가 작거나 부채 상환 부담이 큰 차주 가구에서 두드러졌다.

 

1일 한국은행이 발표한 ‘BOK 경제연구: 환율급등 경험과 가계소비 간의 관계 분석’에 따르면 가계의 환율 급등 경험이 축적될수록 환율 상승이 소비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은 제한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기존 거시경제학계에서는 원·달러 환율 상승이 수입 물가를 밀어올려 가계의 실질구매력을 갉아먹고 소비 위축을 부른다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1997년 외환위기 이후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2022년 이후 지정학적 리스크 등 반복된 고환율 국면을 거치면서 실제 가계소비의 위축 폭은 외환위기 당시보다 점차 완화되는 모습을 보여왔다.

 

보고서에서 1998년부터 2024년까지의 한국노동패널 자료(총 4,460개 가구 관측치)를 바탕으로 고정효과 패널 모형을 추정한 결과, 가계의 환율 급등 경험과 원·달러 환율 간 상호작용항 계수는 11.400으로 통계적으로 유의한 양(+)의 값을 기록했다. 즉 과거에 환율 폭등 충격을 많이 겪어본 가계일수록 현재 환율이 크게 치솟더라도 지출을 상대적으로 덜 줄인다는 의미다.

 

최영준 거시경제연구실 연구위원은 “거시건전성 규제 등 외환·금융안정 정책이 강화된 측면도 있지만, 반복적인 환율 급등을 겪으며 가계가 고환율 환경을 관리 가능한 위험으로 인식하고 소비 지출을 유연하게 조정하는 학습 효과를 형성한 영향”이라고 분석했다.

 

이러한 적응적 소비 행태는 품목별로 식료품 등 기초소비재보다는 통신비와 같은 선택재에서 가장 뚜렷하게 관찰됐다.

 

세대 및 자산 계층별 차이도 뚜렷했다. 세대별로는 외환위기와 금융위기 등을 온몸으로 겪어낸 ‘X세대’에서 고환율 시기 소비 유지 경향이 유의미하게 나타난 반면, 대규모 환율 급등을 직접 경험한 기간이 짧은 ‘MZ세대’에서는 환율 상승 시 소비가 유의하게 줄어드는 음(-)의 관계를 보였다.

 

또한 자산 규모가 작은 하위 분위(Q2) 가계나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이 높은 고DSR 가계(Q5)일수록 고환율 국면에서 환율 급등 경험에 따른 적응 효과가 더 강하게 나타났다. 상대적으로 재정 여력이 빠듯한 가계일수록 과거 경험을 토대로 필수재와 선택재의 지출 비중을 빠르게 재조정하며 소비 충격을 완충한 것으로 풀이된다.

 

최 연구위원은 “가계가 반복된 대외 충격 속에서 경제 환경 변화에 스스로 적응해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면서도 “적응 방식이 계층과 세대별로 불균등하게 나타나는 만큼, 향후 거시·금융정책 수립 시 정책의 예측 가능성을 높이는 동시에 취약계층의 소비 격차가 벌어지지 않도록 면밀한 모니터링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현정민 기자 mine04@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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