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부가 자동차손해배상보장법(자배법) 시행령 및 시행규칙 개정안을 입법예고한 상태에서 의료계는 환자의 의료받을 권리를 침해한다며 시행령 철회를 요구하고 나섰다. 앞으로 가벼운 부상을 입은 경상환자가 보험사에 제출해야 하는 서류가 보다 까다로워진 것으로 의료계는 반발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경상환자에 대한 치료 기준이 없어 객관적인 평가가 부재하다는 지적도 함께 나온다.
5일 한국도로교통공단 교통사고분석시스템(TAAS)에 따르면 최근 10년간(2014~2023년) 교통사고 사망자수는 6.7%, 중상자수는 10.3% 줄어든 반면 경상자수는 3.5% 늘었다.
자동차보험 대인사고율은 감소 추세를 보이지만 경상환자 수 및 1인당 치료비 증가로 치료비가 올라가면서 총 대인손해액도 전체적으로 늘었다. 정부에 따르면 과잉진료 및 장기치료로 관절과 근육의 긴장, 삠(염좌) 등의 진단을 받은 환자에게 지급되는 치료비는 최근 6년간 연평균 9%로 나타났다. 이는 중상환자(연 3.5%)보다 2.5배 이상 높은 수치며 2023년 한 해에만 약 1조3000억원에 달했다.
전체 자동차 사고 환자수는 큰 변화가 없고, 환자의 경상화에도 불구하고 대인배상 치료비는 오히려 급증했다.
정부는 제도적 근거가 없는 향후 치료비를 보험사가 관행적으로 지급해 2023년 기준 그 규모는 치료비보다 많은 1조4000억원에 달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자동차보험에 가입한 2400만명의 보험료도 상승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고 분석했다.
정부는 자배법 개정안을 통해 자동차사고 피해 정도에 맞는 배상 체계를 마련하고, 보험료 산정요율, 지급보증 절차 등 자동차보험의 세부 운영방식을 현실에 맞게 개선하다며 부정수급 행위 방지에 나섰다. 올 2월 국토교통부, 금융위원회 등은 상해등급 12~14급에 해당하는 경상 교통사고 환자가 8주 이상 치료를 받을 경우, 치료 개시 후 7주 이내에 상해의 정도 및 치료 경과에 과한 자료를 보험사에 제출해야 한다는 자배법 시행규칙 일부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대한한의사협회는 정부의 개정안에 대해 “보험사의 비용 절감을 최우선으로 한 졸속 행정이며 국민의 치료받을 권리를 침해하는 반의료적 정책 개악”이라며 철회를 촉구했다. 그러면서 “개정안이 시행되면 환자는 치료 연장을 위해 일방적으로 정해진 기한 내에 자료를 준비해, 보험사에 직접 제출해야 한다”며 “이럴 경우 보험사는 해당 자료를 자의적으로 평가하고 진료비 지급 여부를 자체적으로 판단하는 셀프 심사 체계를 갖추게 된다”고 설명했다.
협회는 “결국 해당 입법예고가 통과될 경우 보험사는 비용을 더욱 줄일 수 있고, 환자는 치료를 포기하거나 자동차보험이 아닌 건강보험을 통해 치료받도록 유도되는 현실이 초래된다”며 “이러한 제도 개악은 자동차보험의 본래 목적을 훼손하고, 공공보험인 건강보험 재정에 부담을 떠넘기는 전형적인 책임 회피”라고 주장했다.

아울러 경상환자의 치료 기준이 명확하지 않은 점도 문제로, 진료기준을 비롯해 경상환자의 상해 입증 책임 강화 등 제도를 보완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지난 5월 한국경영법률학회 특별정책세미나에서 김소연 중앙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경상환자의 손해액은 2015년 1조7000억원에서 2019년 2조8000억원으로 증가했으며 이 기간 치료비가 3배 높은 한방치료 선호 현상이 심화돼 한방 비중은 38.9%에서 66.5%로 높아졌다”고 설명했다.
이런 상황에서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의료기관의 진료단계에서 사고정보 등을 확인할 수 있는 절차가 부재해 경미사고임에도 과잉치료가 유발되며, 현행 자배법상 치료비 지급보증제도는 피해자의 상해 여부와 정보에 대한 정보없이 대인사고 접수여부, 가해자의 보험가입 금액만 확인하기 때문에 피해자의 주관적 통증 호소만으로 계속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문제를 짚었다. 또한 양방진료에 비해 한방진료는 비급여가 많고, 심사에 필요한 자료 수집 근거가 제한적이라 도덕적 해이가 발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경미사고의 경우, 경상환자의 주관적 주장에 의존한 상해 진단이 아닌 의학적·공학적 기준을 통한 객관적인 상해위험 판단 기준과 절차의 제도적 마련, 경미사고에 대한 보험금 지급 절차와 기준에 대한 법제화, 경상환자 진료 시 표준화된 진료지침 마련 등 제도 개선안을 제안했다.
이주희 기자 jh224@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