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 자사주를 소각한 기업 수가 이미 지난해 규모를 넘어선 것으로 나타났다. 정치권을 중심으로 자사주 소각 의무화 논의가 본격화되면서 상장사들이 선제적 대응에 나섰기 때문이다. 여권은 이번 정기 국회에서 자사주 소각 의무화를 포함한 3차 상법 개정안을 추진 중이다.
4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지난달 말까지 자사주 소각을 공시한 기업은 총 206곳으로 지난해 전체 수치인 177곳을 훌쩍 뛰어넘었다. 시장별로 보면 유가증권시장 소속 기업이 120곳, 코스닥시장은 86곳에 달했으며, 자사주 소각 규모 역시 큰 폭으로 증가했다. 같은 기간 소각된 자사주의 금액은 약 5619억원이며, 지난해 전체 소각액인 4809억원을 이미 초과했다. 지난달 자사주 소각을 공시한 기업은 HMM(2조1000억원), 메리츠금융지주(5514억원), 네이버(3684억원) 등이다.
자사주 소각은 기업들이 매입한 자사주를 쌓아두지 말고 의무적으로 없애는 것이다. 발행 주식 수가 줄어 주당순이익(EPS·Earning Per Share)을 증가시키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직접적인 주주 혜택 효과가 발생한다. 다만 국내 기업은 자사주를 보유하면서 우호 주주들에게 매각하는 등 경영권 방어를 위해 쓰는 경우가 많았다. 이재명 대통령이 자사주 소각 의무화를 공약으로 내건 것은 이를 코리아 디스카운트(국내증시 저평가) 요인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여권은 이번 정기 국회에서 자사주 소각 의무화를 골자로 한 3차 상법 개정을 예고한 상태다. 현재 더불어민주당의 김현정 의원과 김남근 의원, 조국혁신당의 차규근 의원 등이 법안을 발의했다. 김현정 의원안은 자사주를 원칙적으로 취득 즉시 소각하도록 규정하고 있고, 김남근 의원안은 자사주 의무 소각 기한을 1년으로 설정하고 있다. 차규근 의원의 개정안은 소각 기한을 6개월로 하고 있다.
주식시장에서도 이 같은 움직임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3차 상법 개정안이 예고된 지난달 25일 이후 지주사와 금융 종목 주가는 상승했다. SK의 경우 지난 3일 기준 12.15%, LS와 HD현대는 각각 9.41%, 6.23% 상승했다. 증권주 중에서는 부국증권 28.41%, 대신증권 10.91%, 신영증권 9.33%, 미래에셋증권 4.10% 올랐다.
증권가는 자사주 소각 의무화가 올해 하반기 자본시장의 주요 이슈로 급부상했으며, 상법 개정의 향방에 따라 기업들의 추가적인 소각 공시도 이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한지영 키움증권 연구원은 “자사주 소각 의무화 등 기업 지배 구조 개선 움직임이 가시화되면 국내 증시에 호재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고, 이경연 대신증권 연구원은 “상법 개정과 맞물려 기업들의 소각 발표가 전년 수준을 넘어섰고, 입법과 단기적 제도 개선이 병행되면서 자사주 규제 강화와 자본 시장 구조 개혁은 지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신현용 유안타증권 연구원은 “전년 대비 순이익 확대가 예상되는 등 안정적인 이익을 기반으로 자사주 매입·소각이 지속될 수 있는 기업을 스크리닝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자사주 비중 상위 종목 중 지난해 이후 자사주를 매입·소각한 이력이 있으면서 올해 순이익 확대가 예상되는 기업으로는 SK, 미래에셋증권, 금호석유화학, 엔씨소프트, 신세계, 유한양행, 포스코 홀딩스 등을 꼽았다.
현정민 기자 mine04@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