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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유적(사진=게티이미지뱅크) |
또한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도 ‘돈’과 ‘경제’란 단어에 목을 매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 한낱 종이쪽지에 지배당하고, 그 종이쪽지에 사회 전체가 얽매여 신음하는 세상에 살게 되었을까?
세계파이낸스는 [안재성의 金錢史] 시리즈를 통해 돈과 금융의 역사에 관해 짚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기록에 따르면 세계 최초의 지폐는 서기 10세기말경 송나라 상인들 사이에서 사용된 예탁증서 형태의 교자(交子)다. 1170년에는 상업이 발달하면서 유통 화폐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남송 정부가 공식적으로 지폐를 발행했다.
서양 최초의 지폐는 14세기 이탈리아에서 탄생했다. 장거리 신용이나 지불의 수단으로 환어음, 지불지시서 등을 활용한 것이 지폐의 시초가 됐다.
서양에서 지폐를 발행한 최초의 정부는 1690년 북아메리카의 매사추세츠 베이 식민지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베이는 당시 캐나다와의 전쟁 때문에 군비 조달을 위해 지폐를 만들었다.
이처럼 지폐의 발행 자체는 동양이 더 빨랐다. 공식적인 정부 발행 지폐 기준으로만 600년이 넘는 차이가 난다.
그러나 ‘지폐 시스템’의 발전 속도는 서양이 동양을 훨씬 앞질렀다. 동양은 지폐가 크게 유통되지 못했으며, 곧 은자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심지어 조선은 후기까지도 물물교환이 대세였다.
반면 서양은 지폐의 근원적 불안정성 때문에 ‘거품 붕괴’, 뱅크런, 하이퍼인플레이션 등 각종 문제를 겪으면서도 각 나라들이 꾸준히 지폐를 발행했다. 지폐 발행을 관장하는 중앙은행을 만드는 등 여러 노력 끝에 지폐가 신뢰를 얻고 사회 시스템에 안착하게 됐다.
지폐가 동양 여러 나라의 공식 화폐로 완전하게 자리를 잡은 것은 식민지 등 서양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후부터다.
이렇게 된 이유는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의 발달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 중 특히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국채다.
정부가 재정이 어려울 때 쓰는 주요한 수단은 국채와 증세다. 그런데 서양은 이미 수천년 전부터 정부가 국채를 발행해 민간으로부터 돈을 빌리는 전통이 존재했던 것과 달리 동양은 국채가 거의 활용되지 않고 사실상 증세에만 의존했다.
이 차이가 경제시스템에 미친 격차는 매우 컸다. 국채의 존재는 지폐 발행을 유도했으며, 나아가 자본주의 경제의 발전에도 일익을 담당했다.
후술하겠지만, 국채는 결코 증세보다 국민에게 좋은 수단이 아니다. 오히려 ‘세련된 약탈’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교활한 수단이다.
하지만 세련되기에 국민을 속일 수 있다. ‘1차 포에니 전쟁’은 국민을 속일 수 있는 국채와 속이지 못하는 증세가 국가경영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나타내주는 좋은 예다.
◇긴 전쟁에 바닥난 재정…서로 다른 정책으로 대응한 로마와 카르타고
‘1차 포에니 전쟁’은 지중해 세계의 강국 로마와 카르타고가 시칠리아 영유를 놓고 벌인 전쟁으로 기원전 264년 발발했다.
이 전쟁은 비록 시칠리아 섬과 그 주변에서만 싸운 국지전이었으나, 양국의 총력전 형태로 진행됐으며 그만큼 치열했다.
전황은 처음부터 로마 측에 유리했다. 충성도가 높은 시민병 위주 편성인 데다 전투 경험이 풍부한 로마군은 충성도 낮은 용병 위주의 카르타고군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뒀다.
육전은 물론이고 해군의 전통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해전까지 압도했다. 코르부스(까마귀)란 이름의 신무기를 앞세워 전쟁 초반 네 번의 큰 해전에서 모두 대승을 거뒀다.
하지만 시칠리아 섬을 잃을 경우 자국 경제력의 절반이 날아가는 카르타고는 끈질기게 버텼다. 로마군은 큰 전투마다 대부분 승리하면서도 전진하고 점령하는데 상당한 시간을 소요해야 했다.
특히 기원전 247년 카르타고군 사령관에 임명된 하밀카르는 그 전까지의 지휘관과는 질이 다른, 빼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그는 시칠리아 섬에 카르타고의 영유지가 릴리바이움과 드레파눔, 단 두 도시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도 선전했다. 정면대결을 피하면서 게릴라전 위주로 로마군을 괴롭혀 4년간 교착 상태를 유지했다.
전쟁은 물경 20년이 지나도록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양국의 재정은 사실상 바닥난 상태였다.
카르타고는 전통적으로 국방을 용병에 의존한다. 덕분에 오랜 전쟁에도 시민의 수는 크게 줄지 않았다. 이는 로마보다 인구가 훨씬 적으면서도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힘을 형성했지만, 대신 돈이 많이 들었다.
용병은 전투가 곧 직업이기에 매년 비싼 급료를 지불하지 않으면 싸우지 않는다. 20년이나 연속으로 용병료를 지불하다보니 카르타고의 국고는 텅텅 비어버렸다.
돈이 없기는 로마도 마찬가지였다. 로마는 병역이 곧 시민의 의무이기에 시민병에게는 최소한의 급료만 지불한다. 그러나 전쟁이 20년이나 계속되면 아무리 인구가 많다 해도 병력 자원의 고갈을 피할 수 없다.
기원전 247년 시행된 국세조사에서 로마의 성인 남자 수는 5년만에 17%나 줄어든 것으로 집계됐다. 이는 곧 병력 자원의 감소와 동시에 세수의 감소를 의미한다.
게다가 로마는 기원전 255년과 기원전 253년, 두 차례의 커다란 해난사고까지 겪었다. 하필 대함대가 항해 중에 풍랑을 만나는 바람에 수백척의 배가 침몰하고, 수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즉 하밀카르가 교묘한 게릴라전으로 버티던 기원전 243년 로마의 국고도 바닥난 상태였다.
재정이 고갈된 양국은 대책 마련에 몰두했다. 다만 서로 시행한 대책이 달랐다.
서양의 경제 개념을 가진 로마는 국채를 발행하기로 했다. 반면 본래 동양의 페니키아인들이 건설한 도시인 카르타고는 국채라는 개념이 없었기에 증세를 선택했다. 이 차이가 전쟁의 승패를 갈랐다.
◇국채로 함대 재건한 로마의 승리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세금이 늘어나는 걸 반기는 사람은 없다. 당시 카르타고도 마찬가지였다.
카르타고가 속령 리비아의 세금을 두 배로 올리자 분노한 리비아인들은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을 진압하느라 카르타고는 돈만 더 많이 써야 했다. 카르타고 시민들에 대한 세금은 반발 때문에 늘리지 못했다.
견디다 못해 단지 돈을, 즉 금화와 은화를 구하기 위해 약탈 전쟁까지 벌일 정도였다.
재정 고갈에 시달리던 카르타고는 기원전 249년의 다섯 번째 해전에서 처음으로 대승을 거두고도 이를 기화로 오히려 해군을 감축해 버렸다. 그만큼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바닥에 떨어진 상황이었다.
로마 역시 돈이 없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국채 발행을 통해 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다.
앞서 말했듯이 국채는 결코 증세보다 신사적인 수단이 아니며, 거꾸로 약탈에 가깝다. 로마 정부는 귀족, 기사 계급 등 소위 부자들에게 국채를 강제로 할당했다. 정확히는 국채라고 이름붙인 종이쪽지를 내밀고, 금과 은을 강탈해 간 것이었다.
물론 로마 정부는 전쟁에서 승리하면 카르타고로부터 뜯어낸 배상금으로 빚을 갚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이는 허망한 약속일 뿐이다. 전쟁에서 패하면 당연히 빚을 갚을 돈도 없을 테고 국채는 휴짓조각이 된다.
그래도 국채는 ‘세련된 약탈’인 것이 세금은 그냥 빼앗기고 끝이지만 빚은 “정부가 갚을지도 모른다”는 미약한 믿음이나마 심어준다. 때문에 로마의 부자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돈을 내놓으면서도 반란은 일으키지 않았다.
이 돈으로 로마는 200척이 넘는 대함대를 재건할 수 있었다. 이런 엄청난 병력에 맞설 능력이 없던 카르타고는 전쟁 수행 의지를 상실해 버렸다. 그들은 강화를 선택했으며, ‘1차 포에니 전쟁’은 로마의 승리로 끝났다.
동양의 역사를 보면 국가가 흔들리는 경우 내부에서도 반란이 일어나는 경향이 종종 보인다. 재정이 부족할 때마다 증세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기 때문이다.
백성들이 배가 고파 눈을 까뒤집는 지경인데도 나라는 오히려 세금을 올린다. 곳간에 남은 마지막 쌀까지 털어간다. 이쯤 되면 반란이 일어나지 않는 게 오히려 신기할 것이다.
반면 서양은 재정 부족을 일단 국채로 메운 뒤 증세는 최후의 수단으로 미뤄두었기에 반란에 시달리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이는 서양의 위정자들이 착해서가 아니라 “세금을 늘리면 반란의 위험이 증가하고,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돈이 더 많이 든다”는 합리적인 판단에서였다.
앞서 말했듯이 국채는 언제든 휴짓조각이 될 수 있다. 다행히 로마는 카르타고로부터 3200탈렌트의 배상금을 받아내 빚을 갚을 수 있었지만, 그 외 서양 역사에서 정부가 빚을 떼먹은 사례는 흔하게 찾을 수 있다.
그래도 빚은 “갚을 것”이라는 거짓된 믿음이나마 심어준다. 이 ‘세련된 약탈’의 효과를 경험한 서양의 정부들은 ‘보다 더 세련된 약탈 기법’을 찾아내려고 여러 가지로 연구를 거듭했다.
지폐도 이 과정에서 태어났다. 서양의 여러 정부가 지폐 발행에 집착한 것은 증세보다 ‘세련된 약탈’이었기에 반발이 상대적으로 작아서였다.
괴테의 명작 ‘파우스트’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분노한 이유 그대로 지폐의 탄생 배경은 ‘사기극’이었다. 다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사기극이 자본주의 시스템을 발전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 과정에 대해서는 후일 더 자세히 논해보고자 한다.
안재성 기자 seilen78@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