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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나리우스 은화(왼쪽)의 은 함유율이 5%까지 떨어지면서 로마의 통화 제도인 은본위제가 무너졌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솔리두스 금화(오른쪽)를 발행, 통화 제도를 금본위제로 바꿈으로써 문제를 해결했다. |
또한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도 ‘돈’과 ‘경제’란 단어에 목을 매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 한낱 종이쪽지에 지배당하고, 그 종이쪽지에 사회 전체가 얽매여 신음하는 세상에 살게 되었을까? 세계파이낸스는 [안재성의 金錢史] 시리즈를 통해 돈과 금융의 역사에 관해 짚어보고자 한다.<편집자 주>
로마는 본래 은본위제 국가였다. 로마의 화폐는 아우레우스 금화, 데나리우스 은화, 세스테르티우스 동화 등 세 가지지만 데나리우스 은화가 주요 화폐로 쓰였다.
세스테르티우스 동화는 요새의 동전처럼 주로 잔돈 계산용이었다. 아우레우스 금화는 화폐라기보다 현대의 예금통장이나 국채처럼 재산 보존용의 성격이 더 강했다. 부동산 매매, 급료 지불, 세금 납부 등에 쓰이는 주요 통화는 데나리우스 은화였다.
그런데 로마 정부가 재정난을 견디다 못해 은화를 평가절하하면서 은본위제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은화의 은 함유율이 떨어지자 자연히 돈 가치도 하락하면서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나중에는 은화의 은 함유율이 5%까지 전락해 사실상 가치가 없는 수준이 되고 만다. 하이퍼인플레이션이 로마를 휩쓸고 국가경제가 망가져 로마는 멸망 직전까지 몰렸다.
이 문제는 후일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은본위제를 금본위제로 변경하면서 간신히 해결된다.
◇계속된 야만족 침입에 재정 거덜난 로마
흔히 로마는 야만족 침입 때문에 멸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3세기의 위기’로 불리는 3세기에는 거의 매년 수십만명의 야만족이 습격해 왔다.
하지만 야만족 침입은 사실 과정에 불과할 뿐이다. 서로마 제국 멸망 직전인 5세기까지도 로마의 군사력은 우수했고 침입해온 야만족을 거듭해서 무찔렀다. 로마를 위기로 몰아넣은 진짜 이유는 극심한 재정난과 은화의 평가절하로 인해 발생한 하이퍼인플레이션이었다.
오현제의 마지막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시절부터 흔들리기 시작한 ‘팍스 로마나(로마에 의한 평화)’는 3세기에 접어들자 본격적으로 붕괴됐다. 북방 야만족들은 라인 강 혹은 도나우 강을 건너 거의 매년 로마로 쳐들어왔다.
처음에는 로마군이 그들을 쉽게 이겼다. 야만족 영토까지 쳐들어가 괴멸적인 타격을 준 것도 여러 번이었다.
하지만 야만족들은 척박한 게르마니아 영토에서 먹고 살기 힘들어 로마를 약탈하러 오는 것이다. 굶어죽든 싸우다죽든 마찬가지니 아무리 패해도 끝없이 몰려왔다.
게다가 로마가 야만족과 싸우느라 약해진 틈을 타 서쪽의 사산 조 페르시아에서 공격해오기도 했다. 로마는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도 대부분 승리했으나 쉴 새 없이 싸움이 계속되다보니 또 다른 문제가 로마를 덮쳤다. 극심한 재정난이었다.
군대는 곧 ‘돈 먹는 하마’다. 매년 10만석의 쌀을 추수하는 대지주가 운용할 수 있는 사병 규모는 겨우 500명뿐이라고 한다. 특히 군대를 이동시키고 전투를 시킬수록 소요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또한 싸우다 죽은 병사를 메우기 위해 새로운 병사를 징집하면 그만큼 경제활동인구가 감소해 세수도 줄게 된다. 뿐만 아니라 야만족은 약탈이 목적이었기에 로마 정규군과의 싸움을 최대한 피하고 방어력이 약한 마을만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때문에 로마의 북방은 갈수록 황폐해지고 농지에서 사람이 떠났다. 그만큼 세수는 더 감소했다.
들어오는 세금은 줄어드는데 나가는 돈은 늘어나니 로마 정부의 재정난은 갈수록 심각해졌다. 처음에는 국채 발행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으나 곧 한계에 부딪혔다. 정부가 빚을 떼먹는 일이 종종 발생하면서 귀족과 부자들이 국채 매입을 거부한 것이었다.
증세는 반란의 위험이 커서 선택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먼 훗날 유럽 각국의 정부는 지폐 발행으로 재정 문제에 대응했지만 이 시기에는 아직 지폐의 개념이 없었다.
결국 로마 정부는 해서는 안될 ‘악마의 수단’에 손대고 만다. 은화의 평가절하였다.
◇하이퍼인플레이션으로 망가진 로마 경제
여러 번 강조했듯이 지폐와 달리 금화와 은화는 내재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 가치는 화폐에 새겨진 액면가가 아니라 함유된 금과 은의 양으로 결정된다. 즉 은화의 은 함유량이 감소하면 은화의 가치도 떨어진다.
본래 로마의 데나리우스 은화는 3.8~3.9g의 무게에 순은으로 만들어졌다. 100% 순은이야말로 데나리우스 은화의 가치를 증명하고 로마 시민들의 은화에 대한 신뢰를 형성하는 기초였다.
그런데 은화의 은 함유량을 줄이면 같은 양의 은으로도 더 많은 통화를 발행할 수 있다는 사실이 로마의 위정자들을 유혹하면서 이 신뢰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맨 처음 은화를 평가절하한 황제는 네로 황제였다. 네로는 ‘도무스 아우레아’를 구상하는 등 건축에 너무 많은 돈을 써서 재정이 부족해지자 은화의 은 함유량을 100%에서 92%로 떨어뜨리고 무게도 3.2~3.8g으로 줄였다.
은화의 가치를 재는 척도인 은 함유량이 감소하자 당장 돈의 가치가 하락하고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네로는 ‘미치광이 황제’로 몰려 집권층에게 살해당한다. 네로가 죽음으로 몰린 진짜 이유는 크리스트교도 탄압이 아니라 인플레이션이었다.
그래도 92% 정도로는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으나 이후 전쟁 비용 마련을 위해 은화가 계속 평가절하된다. 콤모두스 황제는 70%로, 카라칼라 황제는 50%로 줄였다.
‘3세기의 위기’가 절정에 달했던 발레리아누스 황제 시기 마침내 은화의 은 함유율은 5%까지 급락한다. 이쯤 되면 더 이상 은화라고 볼 수도 없다. 은도금된 동화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은화의 신뢰가 무너지자 곧 하이퍼인플레이션의 파도가 로마를 덮쳤다. 물가는 천정까지 치솟았으며 경제활동은 마비됐다. 불안을 느낀 사람들이 옛날에 발행된 100% 순은의 데나리우스 은화는 집안에 숨겨둔 채 쓰지 않는 상황까지 생겨났다. ‘장롱 예금’이 늘어나면서 돈이 돌지 않게 되자 자연히 국가경제는 더 심하게 망가졌다.
당연히 재정은 점점 더 나빠졌다. 예전에는 수십만 대군을 어렵지 않게 동원하던 로마가 수만 군대를 편성하는데도 허덕댈 정도였다.
워낙 로마의 군사력이 막강해서 그 와중에도 야만족과의 싸움은 계속해서 승리했으나 희망적인 결과로는 연결되지 않았다. 로마는 헤어나올 수 없는 수렁 속으로 점점 빠져들고 있었다. 카루스 황제 시절 사산 조 페르시아의 수도 크테시폰을 점령하고 금은보화를 약탈해 겨우 숨을 돌렸지만 이 역시 미봉책에 불과했다.
인플레이션 문제를 해결하려면 은화의 신뢰도를 되찾아 은본위제의 기능을 회복해야 한다. 문제는 이미 은 함유율 5%의 데나리우스 은화와 안토니누스 은화가 대거 풀린 상태라 은화의 가치를 더 이상 믿을 수 없게 된 점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100% 순은의 아르겐테우스 은화를 새롭게 발행했음에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로마를 끔찍한 난국에서 구한 것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였다. 수십년간의 내전에서 승리해 로마 제국 황제가 된 콘스탄티누스가 내놓은 해결책은 발상의 전환이었다.
그는 은화의 신뢰도를 올리려는 작업을 포기하고 아예 은본위제를 금본위제로 바꿔 버렸다. 이후 콘스탄티누스가 발행한 솔리두스 금화가 로마의 주요 통화로 활용된다. 금본위제가 확립되자 비로소 낭떠러지까지 몰렸던 로마 경제에 숨통이 트인다.
콘스탄티누스는 훗날 대제로 불린다. 최초로 크리스트교를 공인한 황제라 중세 유럽을 지배했던 크리스트교로부터 대제라는 호칭을 얻은 것이다. 그러나 종교적인 업적을 차치하고 금본위제를 수립해 경제적인 혼란을 해결한 것만으로도 콘스탄티누스가 대제라 불릴 가치가 충분하다.
서로마 제국은 무능한 황제와 황족의 권력 다툼 때문에 정치가 엉망이 되면서 결국 5세기에 멸망한다. 그러나 새로운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건설하는 등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직접 설계한 동로마 제국은 그의 사후에도 1000년이 넘는 장구한 세월을 버텨냈다. 콘스탄티누스는 제국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은 것이다.
안재성 기자 seilen78@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