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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청나라의 아편 중독자들. 영국은 청나라에 아편을 밀매해 큰 이익을 남기다가 청나라 정부가 아편 밀수를 금지하자 이에 반발해 `아편전쟁`을 일으켰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
영국 정부와 영국 상인들은 아편 판매로 얻는 이익에 열광한 반면 청나라는 심각한 은의 유출과 아편 중독자의 범람으로 신음했다. 1824년에는 973만달러어치, 1830년에는 1374만달러어치의 아편이 청나라에 수입됐다. 1838년이 되자 4만상자가 넘는 아편이 청나라에 유입되는 등 아편 수입량은 매년 급증했다.
청나라 황제 도광제가 아편 밀매를 차단하기 위해 등용한 임칙서가 “더 이상 이 문제를 방치하다간 수십년 후 중원에는 적을 막을 병사도 없고 군비에 쓸 은도 없을 것”이라고 우려할 정도였다.
청나라 정부는 아편 밀매를 엄격히 금지하고 영국 상인이 싣고 온 아편을 모두 몰수해 처분했다.
아편은 마약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마약의 유통을 합법화한 정부는 없었다. 영국 정부도 당연히 아편의 매매는 물론 아편을 피우는 것도 금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청나라 정부의 조치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영국정부의 화답은 전쟁이었다.
◇“아편 몰수는 우리를 무시한 것”…전쟁 결의한 영국 의회
도광제는 “반드시 아편 밀매를 뿌리뽑아라”는 엄명과 함께 임칙서에게 전권을 줘 광동성으로 파견했다. 당시 청나라에서 영국, 미국 등 외국 상인들이 무역을 할 수 있는 곳은 광동성의 광저우 항구뿐이었으며 아편 밀도 이곳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탐관오리가 넘쳐나는 청나라에서 드물게 청렴하고 능력까지 갖춘 임칙서는 아편 문제에 결연한 의지를 가지고 대응했다. 광저우에 도착하기도 전에 아편 밀수꾼 60여명을 체포한 그는 도착 즉시 영국 상인들의 아편을 몰수했다.
영국 상인들은 1037상자의 아편만 공출함으로써 ‘눈 가리고 아웅’식으로 넘어가보려 했지만 이미 임칙서는 그들이 배에 보관 중인 아편이 2만상자가 넘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임칙서는 영국 상인들이 머무는 13행가를 포위하고 물과 식량까지 차단시키는 강경책으로 나왔다. 결국 영국 상인들은 임칙서에게 굴복해 총 2만284상자, 1425톤에 달하는 아편을 내놓아야 했다. 임칙서는 몰수한 아편을 몽땅 소금물에 넣어서 처분했다.
영국의 무역 감독관 찰스 엘리엇은 임칙서의 조치에 노발대발했다. “앞으로 아편을 밀매하지 않겠다”는 서약까지 거부한 엘리엇은 정부에 “중국인들은 대화가 통하지 않는 야만족 무리이니 강경책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보고를 보냈다.
적반하장 그 자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엘리엇을 비롯한 영국 관료들은 자신들의 무력에 자신감이 있었으며 동양인을 깔보고 있었기에 런던에서도 강경론이 득세했다.
‘나폴레옹 전쟁’의 영웅 아서 웰링턴 공작마저 “50년 공직 생활 동안 영국 국기가 광동에서 당한 것과 같은 모욕을 본 적이 없다”며 날을 세웠다. 그만큼 그들은 자신들의 마약 밀수를 청나라 정부가 방해한다는 것만으로 동양을 얕보고 있었다.
결국 영국 의회에서 청나라와의 전쟁은 271 대 262로 가결됐다.
◇비도덕적인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
조선과 일본보다 비도덕적이라 식민지가 된 게 아니듯 국가 간의 전쟁에서 명분보다 더 중요한 것은 힘이다.
나폴레옹 전쟁 등 수많은 전쟁을 치루면서 전쟁 기계 수준으로 발전한 영국 해군을 감당하기에는 오랫동안 평화에 찌든 청나라 군대는 너무 허약했다. 특히 그 군대를 지휘해야 할 청나라 상층부는 썩을 대로 썩어 있었다.
영국 정부는 여러 척의 군함을 동원하고 아일랜드 제 18연대, 보병 제 26연대, 벵골 공병 2개 중대, 마드라스 포병 2개 중대 등 4000여명의 병력을 동원했다. 지휘는 찰스 엘리엇의 사촌형인 조지 엘리엇이 맡았다.
비록 청나라 군대가 기술적으로나 병력의 질로나 영국군에게 심히 뒤처진다고 하나 엄연히 청나라는 안방에서 싸우는 전쟁이며 영국은 지구 반 바퀴를 돌아가야 하는 원정이다.
청나라 지휘부가 강인한 의지를 지니고 대응했으면 장기전을 버티기 힘든 영국과 최소한 대등한 입장에서 협상은 가능했을 것이다. 실제로 영국 해군은 1만 병력을 모아 단단한 방어선을 형성해놓은 광동성은 건드리지도 않았다.
대신 전쟁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청나라 수도 북경을 노렸다. 주산 열도가 점령되고 북경 바로 앞인 천진까지 영국 해군이 진군하자 북경 정부는 즉시 백기를 들었다.
그들은 영국에게 아부하고자 강인한 의지를 지니고 아편 척결에 앞장선 임칙서를 해임하고 스스로 광동성의 방어 설비를 철수하기까지 했다. 이후 북경 정부는 영국 해군이 물러나자마자 아무런 준비도 없이 강경책을 외치는 무모한 짓을 했다가 다시금 참패하는 볼썽사나운 모습을 연출하기도 했다.
결국 청나라는 영국과 굴욕적인 난징 조약을 맺는다. 이 조약에서 청나라는 전쟁배상금 외에도 몰수한 아편 대금으로 영국에게 따로 600만달러어치의 은을 지불했다.
참으로 비도덕적인 명분으로 시작된 전쟁이지만 어쨌거나 힘의 논리에 의해 전쟁 자체는 영국이 승리한 것이다. 다만 “아편 밀수를 방해하는 것은 영국을 모독하는 것”이라는 황당한 트집에 의해 시행된 아편전쟁은 두고두고 영국 역사의 오점으로 남게 된다.
여담이지만 이런 명분으로 전쟁을 하는 것은 너무나 불명예스럽다고 생각한 영국인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영국 의회의 젊은 의원 윌리엄 글래드스턴은 “이것은 악명 높은 마약의 밀수를 보호하기 위한 전쟁”이라며 “이토록 영속적인 불명예가 될 전쟁을 나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고 연설했다.
사실 글래드스턴의 날카로운 지적 덕에 그나마 의회에서 반대표가 262표나 나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단 9표 차이로 영국은 지금까지도 비판과 조롱을 받는, 부도덕한 전쟁을 저지르게 된다.
안재성 기자 seilen78@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