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성의 金錢史]화폐 안 통하자 조선 약탈한 명군

명군, 은자로 식량 구입 시도…화폐 모르는 조선인 거절
분노한 명군, 약탈 자행…곡물·가축 등 빼앗아

조선 시대의 화폐 상평통보. 1678년 숙종조부터 발행됐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은 화폐가 없어서 명나라 병사들의 약탈을 유발했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임진왜란 당시 조선 백성들 사이에서 “왜군은 얼레빗, 명군은 참빗”이란 유행어가 돌았다.

조선을 침략한 왜군은 조선인들을 약탈했다. 그런데 엄연히 조선을 지원하러 온 명군까지 조선인들을 약탈한 것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명군은 쌀, 콩, 보리 등 곡물은 물론 닭, 소, 돼지 등 가축까지 빼앗아가고 심지어 아녀자들도 겁탈했다고 한다.

이들의 행패가 오죽 심했으면 촘촘한 참빗으로 긁어낸다고 표현을 했을까.  그런데 슬픈 사실은 명군이 처음부터 조선을 약탈할 생각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한심할 정도로 후진적인, 그 때까지도 화폐 제도를 구축하지 못한 조선의 경제시스템이 그들의 약탈을 유발했다.

◆은을 안 받는다고?

임진왜란이 벌어지고 조선 수도 한양이 순식간에 함락되자 명(明)나라는 제후국을 도울 겸 순망치한(脣亡齒寒)의 논리에 따라 전화가 자국까지 번지는 것도 막을 겸 해서 대군을 파견했다. 서기 1592년말 이여송을 총대장으로 하는 5만여명의 명군이 압록강을 건넜다.

다만 멀리 조선까지 나아가 원정하는 것은 아무리 대국인 명나라라고 해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병사들을 먹이는 일이 골칫거리였다.

먼 곳까지 원정하는 병사들에게 군량을 충분히 보급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천 리를 돌아 군량을 수송하면, 병사들의 얼굴에 굶주린 기운이 감돈다”는 오래된 격언이 있을 정도다. 

임진왜란 때도 마찬가지였다. 요동을 돌아 직접 군량을 수송하자니 너무 멀고 비효율적이다. 전 국토가 왜군에 짓밟혀 세수가 끊긴 조선 조정에 충분한 군량 조달을 기대하기도 힘들다.

그래서 명나라 조정은 병사들에게 평상시보다 급여를 훨씬 풍족하게 지급했다. 그 돈으로 현지에서 식량을 구입할 것을 권했다. 하지만 막상 식량을 사러 간 명나라 병사들은 황당한 꼴을 겪어야 했다.

병사들이 조선 백성들에게 은을 내밀자 “이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물건을 받고 곡식이나 고기를 내줄 순 없다”며 모두가 고개를 흔든 것이었다. 

당시 명나라는 일조편법 시행 후 은본위제가 확립된 상태였다. 명나라뿐 아니라 일본도 동전을 중심으로 한 화폐 제도가 잘 형성돼 있었다. 유럽은 이미 수천년 전부터 화폐 경제를 영위했다.

하지만 조선은 그 시기, 16세기말까지도 여전히 물물교환 경제에 머물러 있었다. 쌀, 비단, 무명 등이 화폐 대신 쓰였으며, 관리들의 급료도 쌀로 지급했다. 물론 세금 역시 곡식이나 특산품으로 받았다.

조선 초기의 우수한 정치시스템을 가리켜 “조선이 매우 선진적인 사회”라고 주장하는 의견이 있다. 그러나 경제시스템에 관한 한 조선은 거의 원시 사회 수준이었다.

실제로 세종대에 일본을 방문한 조선 사절들이 일본에서 동전이 널리 유통되는 것을 보고 감탄한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나 그들이 화폐 제도의 유용함을 조정에 보고했음에도 조선 조정은 전혀 화폐 도입에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돈을 내고 사겠다”는데도 거절당한 명군은 결국 분노를 터뜨린다. 화가 난 그들은 은을 주는 대신 무력을 앞세워 강제로 곡식과 고기 등을 빼앗았다.

한 번 약탈이 이뤄지자 그 다음은 유행처럼 약탈이 번져갔다. ‘상국의 병사’란 이유로 조선 조정이 우물쭈물하면서 제대로 대응하지 않자 그들의 행패는 더 극심해졌다. 급기야 살인, 방화, 강간까지 자행된다.

◆대동법 시행 후 화폐 제도 구축 

일이 이 지경이 되었음에도 조선 조정은 여전히 화폐 도입에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들은 100년 가까운 시간을 그냥 허비한다.

간신히 화폐가 도입된 것은 17세기말 숙종조에 이르러서였다. 이유는 대동법 시행 및 그로 인해 생겨난 왕실의 필요 때문이었다.

광해군 재위 시절 조선은 대동법을 시행함으로써 진상을 특산품이 아니라 곡식으로 내게 했다. 덕분에 방납의 폐단이 대부분 개선됐지만, 대신 조정과 왕실에 필요한 특산품을 따로 구입해야 하는 문제가 생겼다.

특산품의 가짓수만 수백 가지인데 이를 일일이 쌀로 구입하려니 보관, 운반, 가격 측정 등의 문제가 심각했다. 여러 특산품을 구해 조정과 왕실에 조달하는 상인들도 대가를 쌀보다 편리한 도구, 즉 화폐로 받기를 원했다.

이에 따라 1678년, 숙종은 상평통보를 발행했다. 조선 시대에 가장 널리 쓰인, 흔히 엽전으로 불리는 화폐다. 결국 왕실에서 직접적으로 화폐의 필요성을 느끼고 나서야 화폐가 도입된 것이다.

그 뒤 조선 조정에서는 상평통보로 물건을 구입하고, 관리들의 급료도 엽전으로 지불하기 시작해 점점 화폐 제도가 자리잡아간다.

화폐 제도 확립은 곧 시장경제의 발달을 의미한다. 화폐 도입 후 조선의 상공업은 그 전보다 크게 발전했다. 일본 및 청나라와의 무역이 국가 경제에 큰 비중을 차지할 정도였다.

물론 훗날 당백전이나 당오전 같은 폐단도 등장했지만 기본적으로 화폐 제도는 조선의 경제시스템 발전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한편 대동법 시행과 화폐 발행 후 이뤄진 조선 후기의 경제시스템 발전을 근거로 ‘자본주의 맹아론’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있다. “열강의 간섭 없이도 조선에서 자체적으로 자본주의가 탄생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힘들다”는 회의론적인 시각이 더 많다.

겨우 태동하기 시작했다고는 하나 조선 후기의 시장경제 수준은 유럽과 비교해 산업혁명 시대는 물론 르네상스 시대, 아니 고대 로마 시대만도 못했다. ‘암흑의 중세’라고 불리는 중세 시대에도 네덜란드 등의 시장경제는 조선과 비교를 불허하는 수준이었다.

일찌감치 화폐와 시장경제가 발달한 일본도 서양의 자본주의 체제를 열성적으로 배우고 나서야 강대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그 일본보다 훨씬 뒤떨어진 조선이 자체적으로 자본주의 경제시스템을 만들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안재성 기자 seilen78@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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