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니홈피’, ‘도토리’, ‘일촌’, ‘파도타기’…
2000년대 수많은 신조어와 트렌드를 이끌었던 싸이월드. 누군가에게는 특별한 추억이 가득 담긴 보물 상자이자, 열어서는 안 될 판도라의 상자이기도 하다.
‘도토리’(사이버 머니)로 샀던 수많은 배경 음악도 빼놓을 수 없다. 기분에 따라 바꿔놓았던 플레이 리스트. 지나간 감정들이 기록물처럼 차곡차곡 쌓여 있다.
당시 미니홈피를 꾸미는 데 쓰였던 도토리는 ‘싸이 열풍’을 타고 활발하게 거래됐다. 전성기에는 하루 300만개, 3억원 어치씩 팔려나가 싸이월드가 도토리 판매로만 1년에 1000억원 넘는 매출을 올렸을 정도였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 판은 완전히 바뀌었다. 핀테크 바람을 타고 업그레이드 도토리 같은 디지털 화폐가 그 자리를 꿰찼다. 바로 ‘스테이블코인’이다.
스테이블코인은 각국의 법정화폐나 금, 채권 등 실물자산에 가치를 연동해 만든 가상화폐를 말한다. 쉽게 말하면 ‘가격이 고정된 디지털 화폐’다. 달러 또는 다른 실물자산에 1대 1로 연동한다.
암호화폐 전체에서 보면 빛에 가깝다. 비트코인의 단점을 보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름도 ‘Stable(안정적인) + Coin(화폐)’이다. 반면 비트코인은 가격이 급등락하는 대표적인 ‘변동성 자산’이다.
보통 스테이블코인이라면,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을 가리킨다.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은 ‘1달러=1코인’ 비율로 실제 달러에 연동되는 구조를 갖는다. 일종의 상품권이나 포인트와 비슷한 구조다.
과거 싸이월드에서 쓰이던 도토리는 스테이블코인과 비슷한 사례다. 도토리 1개는 늘 100원과 같은 가치를 가진다.
스테이블코인의 열기는 전 세계 곳곳에서 펄펄 끓고 있다. 미국에서는 이미 서클(USDC)이나 테더(USDT)와 같은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이 실생활 거래에서 활용 중이다.
일본은 일찍부터 스테이블코인 관련 규율 체계를 마련해 금융사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 홍콩도 규제 샌드박스를 도입해 실험을 허용했고 유럽연합(EU)은 가상자산시장법을 통해 스테이블코인을 제도권에 편입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상황은 어떤가. 최근 국회에서 스테이블코인 관련 법안이 활발히 논의 중이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에서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발행과 유통을 구체적으로 제도화한 법안이 처음 발의됐다.
안도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28일 ‘가치안정형 디지털자산의 발행 및 유통에 관한 법률안’을 대표 발의했다. 이 법안은 금융회사나 상법상 주식회사가 자기자본이 50억원 이상이고, 전산 설비 및 전담 인력을 갖춰야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할 수 있도록 했다.
안 의원은 이번 법안에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추진할 때는 반드시 금융위원회에 총발행 한도와 유통 계획, 준비자산의 구성 및 상환 방식 등을 담은 백서를 사전 신고해 인가받아야 한다는 규정도 넣었다.
스테이블코인의 준비자산은 현금, 요구불예금, 만기가 1년 이하인 국채와 지방채 등 유동성이 높은 실물자산으로 구성하도록 했다. 준비자산 규모는 발행 잔액 이상을 유지하도록 했다. 투자자 보호를 위한 규정도 마련했다.
물론 장밋빛 미래만 보장된 건 아니다. 사실 우리나라는 주요국과 결정적 차이가 있다. 원화는 역외 외환시장에서 현물로 거래가 불가능하다.
역외 외환시장이란 한국 영토 밖에서 외국 통화가 거래되는 시장으로 런던, 뉴욕, 싱가포르의 외환시장이 대표적이다. 주요국 통화는 24시간 자유롭게 거래되지만, 원화는 특정 시간 동안 정해진 기관을 통해 한국 내 시장에서만 환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누가 발행할 것인가’도 문젯거리다. 정부가 직접 발행하기엔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와 중복될 우려가 있고, 민간이 발행하면 통화질서에 혼란을 줄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금융 범죄에 악용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자금 흐름 추적이 어려운 코인 특성상 외환규제나 과세회피, 자금세탁 수단으로 악용될 우려가 있어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법안이 갖는 상징성과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정부와 금융권, 산업계 모두 이 기회를 전략적으로 설계하고 실행해야 한다. 조금 더디 가더라도 구조적 안정성과 지속 가능성을 촘촘하게 잘 따져봐야 한다.
맹렬한 불볕더위가 땅을 훑고 지나가는 계절. 한낮의 열기가 밤에도 식지 않고 이어진다.
그러나 이 여름도, 끓어오르는 스테이블코인의 열기도 언젠가는 식을 것이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이럴 때일수록 주변에 휘둘리지 말고, 기본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김민지 경제부장
김민지 기자 minji@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