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지급결제 시장에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새로운 변수로 떠오르면서, 카드사 주도의 발행 필요성과 은행 중심의 제한적 도입 논의가 맞물리고 있다. 전문가들은 결제 효율성과 수수료 절감 측면에서 카드사의 선제적 대응을 강조한 반면, 한국은행은 금융 안정성과 제도적 장치 측면에서 은행 중심 도입이 바람직하다고 평가했다.
21일 서울 중구 은행회관에서 열린 한국신용카드학회 콘퍼런스에서 김상봉 한성대 교수는 “스테이블코인은 기존 금융 시스템을 뒤흔들 잠재력이 있다”며 기술이 발달하고 결제 시스템을 관여하는 카드사의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주장했다.
김 교수는 이날 발표에서 “지급결제 시장을 관리해온 카드사가 먼저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해야 통화주권을 지킬 수 있다”고 말했다. 기존 결제·송금 시스템은 높은 수수료와 느린 정산이 문제였지만 스테이블코인과 금융권 융합 시 정산 속도가 빨라지고 수수료도 낮아질 것이라는 설명이다.
김 교수는 “스테이블코인 결제 시 1% 수준의 수수료가 적용돼 비용 절감효과가 크다”며 “해외 결제에서도 카드사가 먼저 스테이블코인 인프라를 구축하면 해외 외국인 소비자 결제에 대응할 수 있고 이를 통해 해외 진출 여건을 마련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글로벌 스테이블코인 시장도 빠르게 팽창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올해 3월 기준 스테이블코인 발행사 테더와 서클은 250억~1000억 달러 규모의 미국 국채를 보유하며 사실상 ‘준화폐’ 역할을 하고 있다고 했다.
기존 암호화폐가 투기적 자산이었다면, 스테이블코인은 채권·현금 등 실물 자산을 1대1로 담보해 결제와 송금 부문에서 기존 화폐 기능을 대체할 수 있으며 영향력이 클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나 스테이블코인이 통화 정책과 외환시장에 미칠 영향에 대해서는 경계했다. 김 교수는 “스테이블코인도 기술적 오류나 해킹이 발생하면 이용자들이 ‘내 돈을 돌려달라’고 몰릴 수 있는데 이 경우 발행사는 보유한 국채를 급하게 매도해야 하고 이는 채권시장에 직접적인 충격을 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스테이블코인을 달러로 즉시 전환할 수 있기 때문에 자본이 빠르게 해외로 이동하는 자본유출 문제로도 이어질 수 있다”며 “이 단계에서는 외환관리법 등 별도의 규제 체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반면, 한국은행은 최근 자료를 통해 은행 중심의 제한적 도입이 바람직하며 국내 지급 인프라 수준을 감안할 때 스테이블코인의 추가 효용은 제한적이라고 평가했다.
한은은 스테이블코인의 혁신성과 결제수단으로서의 중요성은 커질 것으로 보면서도 ‘1코인은 1원’이라는 약속을 잘 지킬 수 있는 제도적 장치 마련을 강조했다. 은행이 발행 주체가 되거나 은행이 주도하는 컨소시엄 방식이 현실적이라는 분석도 내놨다.
비은행 금융기관이 발행할 경우 사실상 지급결제 전문 은행업을 비금융기업에 허용하는 셈이며, 시장 신뢰가 무너지면 코인런이 은행 뱅크런보다 훨씬 빠르게 발생할 수 있다는 게 한은의 설명이다.
한은은 “준비자산을 100% 국채 등 안전자산으로 구성하더라도, 시장 신뢰가 무너지는 순간 코인런이 발생할 수 있고 그 속도는 은행의 뱅크런을 훨씬 뛰어넘을 것”이라고 말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스테이블코인은 대표적 안전자산으로 여겨지는 미국 국채 가치가 하락할 경우에도 코인런 위험에 노출된다. 부도 위험이 아니라, 투자자들이 원하는 시점에 원하는 가격으로 국채를 현금화하지 못할 수 있다는 유동성 위험 때문이다.
스테이블코인의 결제 효용도 제한적으로 평가했다. 국내 이커머스 플랫폼 결제 환경에서 스테이블코인은 거래가 완료되면 취소가 어렵고, 환불 시 별도의 역거래와 추가 수수료가 발생할 수 있어 반품·취소가 많은 거래 환경에 부적합하다는 입장이다. 한은에 따르면 이커머스 플랫폼의 평균 반품률은 약 20%에 달한다.
또한 스테이블코인이 상거래 결제에 활용되는 사례를 봐도, 실제 결제는 비자(Visa)·마스터카드(Mastercard) 등 기존 카드사 네트워크에 의존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스테이블코인 결제가 도입되더라도 의미 있는 수준의 수수료 절감 효과도 불확실하다고 봤다.
이주희 기자 jh224@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