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내 과로사 ZERO] 산재 인정받기 힘든 과로·스트레스... “지원책 절실”

1123 과로사 없는 택배만들기 시민대행진 기획단이 지난 20일 서울 종로구 광과문 광장 북단에서 '이번주 일요일, 광화문에서 만나요!' 1123 과로사 없는 택배만들기 시민대행진 선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시스

 정부가 ‘산업재해와의 전쟁’을 선포하는 등 연일 강경 대응에 나서고 있지만 정작 과로와 스트레스로 인한 산재 예방 대책은 미비한 실정이다. 사각지대 속 과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노동자들을 위한 지원책이 절실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26일 근로복지공단이 국회 기후에너지환경노동위원회 소속 이학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최근 5년 동안 뇌심혈관계 질환 산재 사망 승인은 총 1059건이었다. 연도별로 보면 뇌심혈관계 질환 산재 사망은 2021년 289건, 2022년 222건, 2023년 186건, 지난해 214건이다. 올해는 8월까지 148명의 산재 사망이 승인됐다.

 

 뇌출혈, 뇌경색, 심근경색 등 뇌심혈관계 질환으로 인한 사망 중 산재 사망 승인을 받는 사례를 보면 과로사가 원인인 경우가 많다. 장시간 근로와 정신적 스트레스, 육체 강도가 높은 업무 등으로 뇌혈관이나 심장혈관이 막혀 사망하는 경우다. 지난해 뇌심혈관계 질환으로 숨을 거둔 노동자 A씨는 발병 일주일 전에 주 85.2시간 일한 것으로 조사됐다. 그 이전 석 달 동안은 주 86.4시간씩 일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다른 노동자 B씨는 뇌심혈관계 질환으로 쓰러지기 일주일 전에 주 80.8시간을 일하며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고 그에 앞서 석 달간은 주 79.4시간씩 일했다. 지난 7월 런던베이글뮤지엄에서 일하다 숨진 20대 직원도 주 58시간에서 80시간 일하는 등 과로에 시달린 것으로 전해졌다.

 

 뇌심혈관계 질환 산재 신청은 최근 5년간 9839건으로 1만건에 육박했다. 하지만 이 중에 산재로 승인된 건은 총 3345건으로 약 34%에 불과했다. 뇌심혈관계 질병이 과로사의 대표적 사망 원인임에도 인과관계를 입증하기 쉽지 않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추락사 등과 같은 사고는 사인이 분명하지만 심장마비와 같은 뇌심혈관계 질환은 사업장과의 인과관계를 밝혀내기가 여타 산재보다 어려울 수밖에 없다. 노동자 사망 등의 중대재해가 발생할 경우 사고를 예방하기 위한 책임을 다하지 않은 사업주·경영책임자를 처벌할 수 있도록 한 중대재해처벌법에도 뇌심혈관계·근골격계 질병, 직업성 암 등은 업무로 인한 것인지 인과관계를 파악하기 쉽지 않다는 이유로 중대재해에서 제외됐다. 

 

 일본은 2014년 과로사 방지법을 만들었지만 우리나라는 과로사란 단어가 법률 용어로도 인정되지 않은 상황이다. 또 현행 제도는 주로 사후 보상에 치중돼 있어 실질적인 예방 체계가 미흡하다는 지적이다. 

지난 서울 종로구 동십자각 앞에서 열린 '과로사 없는 택배 만들기 시민대행진'에서 택배 노조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시스

 과거 국회에선 과로사 방지법이 논의됐지만 모두 임기만료로 폐기됐다. 22대 국회에선 기후에너지환경노동위 소속 박홍배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 15인이 장시간 노동으로 인한 과로사를 체계적으로 예방하기 위한 ‘과로사 예방 및 장시간 노동 방지를 위한 특별법안’을 발의한 상태다. 해당 법안은 과로사의 정의를 법률에 명확히 규정하고 근로기준법상 노동자뿐만 아니라 플랫폼 노동자 등 노무제공자까지 보호 대상으로 포함했다. 또 실태조사, 연구개발, 상담 지원 등 국가책임형 예방 체계를 구축하고 자발적으로 근로시간을 단축하거나 제도를 개선한 사업주 및 과로사 예방 활동을 수행하는 민간단체에 대한 재정 지원 근거도 담았다. 

 

 노동계에선 노동자 정신건강 보호 대책도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최근 감정노동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이 스스로 세상을 등지는 일이 잇따르고 있다. 서비스직뿐만 아니라 일반 직장인도 감정노동에 시달리는 시대지만 노동자 보호책은 미비한 것이 현실이다. 한국노동연구원은 ‘근로자들의 정신건강과 근로환경, 그리고 산업재해’ 보고서를 통해 현재의 산업안전보건법제는 주로 신체건강에 중점을 두고 있어 정신건강을 보호할 수 있는 법·제도 변화가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양승엽 노동연구원 부연구위원은 ‘근로자 정신건강 보호법제의 한계와 개선 방안’에서 “현행 산업안전보건법(산안법)에서 정신건강에 관한 사업주 의무를 정한 내용은 네 군데에 불과하다”며 “사업주가 조치해야 하는 내용이 매우 한정적이고 조치 의무 역시 실효적이지 않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양 부연구위원은 노동자들이 산재가 발생할 급박한 위험이 있는 경우 작업을 중지하고 대피할 수 있는 권리를 뜻하는 ‘작업중지권’을 정신건강에는 사용이 불가능한 점, 사업장 내 산재를 막기 위한 위험 요소를 사전에 평가해 예방하는 ‘위험성 평가’ 역시 정신건강은 사실상 제외된 점을 짚으며 변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 밖에도 근로자 정신건강을 보호하는 직접적인 내용을 담은 '직장 내 괴롭힘' 금지 조항이 5인 미만 사업장에도 적용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정인 기자 lji2018@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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