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구의 한 증권사 PB센터 앞. 육중한 전용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은은한 침향 냄새와 함께 고급 갤러리를 방불케 하는 긴 복도가 펼쳐졌다. 이곳에는 창구도, 번호표도, 대기 고객의 웅성거림도 없었다. 예약제로 운영되는 프라이빗 룸에는 전담 PB와 세무사, 부동산 전문가가 한 팀이 돼 한 자산가의 가업 승계와 해외 부동산 투자 포트폴리오를 점검하고 있었다. 테이블에는 최고급 다기와 상속세 절세 전략과 해외 부동산 포트폴리오가 담긴 태블릿 PC가 보였다. 벽면에는 수억 원을 호가하는 현대 미술품이 걸려 있고, 최고급 드립 커피가 서빙됐다. 밖은 고금리와 경기 침체로 신음하고 있지만, 이 폐쇄적인 공간 속에서는 수십 수백억 원 단위의 자산이 조용하고 치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경기 침체와 고물가로 대중 소비 심리가 위축되고 있지만, 상위 1%를 향한 유통·호텔·금융업계의 ‘VVIP마케팅’은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 기업들은 이제 물질적 풍요가 흔해진 시대에 단순한 혜택을 넘어 돈으로 사기 힘든 희소한 경험과 배타적 커뮤니티를 제공하며 부자들의 마음을 공략하고 있다. 이에 VVIP들은 남들과 다른 차별적 대우와 정서적 만족에 지갑을 열고 있다.
유통업계는 최근 VVIP 등급의 진입 장벽을 대폭 높이며 희소성 강화에 나섰다. 주요 백화점들은 연간 구매액 1억원 이상인 최상위 등급을 더욱 세분화하고 있다. 롯데백화점은 ‘에비뉴엘 블랙’ 등급을 최상위 777명으로 한정했고, 신세계는 상위 999명을 위한 ‘트리니티’ 등급을 운영 중이다. 이들에게는 정기 휴점일에 쇼핑 기회를 제공하거나, 전담 컨시어지가 1대1로 동행하는 쇼핑 서비스를 제공한다. 특히 최근에는 MZ세대 영앤리치를 겨냥해 ‘클럽 YP’와 같은 전용 라운지를 운영하며 영리치 유입에 공을 들이고 있다.
호텔업계는 개인의 취향과 라이프스타일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연회비 수백만 원대의 멤버십은 기본이며, 유명 셰프와의 프라이빗 디너, 고가 미술품 경매 행사 초청 등 일반 투숙객은 접근할 수 없는 독점적 콘텐츠를 제공한다. 또한 반려동물과 함께하는 VVIP 패키지 등 개인화된 취향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금융권은 자금 운용에서 자산 대물림과 문화 향유로 확장하고 있다. 특히 은행과 증권사에는 30억원 이상의 자산가들을 대상으로 하는 ‘패밀리 오피스(Family Office)’ 서비스가 대세로 자리 잡았다. 수익률 상승은 물론 세무, 법률, 부동산, 자녀의 유학 컨설팅이나 결혼 매칭 서비스까지 제공한다. 인공지능(AI)이 자산 배분을 결정하는 시대가 왔지만, 초고액 자산가들은 여전히 사람이 제공하는 고도의 판단과 정서적 케어를 원하기 때문이다.
지난달 한국투자증권이 개최한 ‘패밀리오피스 컨퍼런스 데이’에서는 서울대 조영태 교수의 인구경제 특강과 바이올리니스트 김빛날윤미의 공연이 함께 진행됐다. 신한투자증권은 골프 초청 행사를 열어 KPGA 및 GTOUR 프로선수 8명이 참여해 고객과 함께하는 레슨 및 스트로크 대회를 성료했다.
특히 과거 PB 센터는 상담 중심이었다면, 최근에는 복합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유명 도슨트의 아트 클래스, 와인 소믈리에의 테이스팅 세션 등을 열어 자산가들끼리의 인적 네트워크 구성을 돕는다. 자산가들에게 ‘이 금융사를 이용하면 수준 높은 정보를 공유하는 집단에 속할 수 있다’는 소속감을 심어주는 전략이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고액자산가의 니즈가 다양화됨에 따라 맞춤형 프리미엄 서비스가 자산관리 경쟁력의 핵심 요소로 부상하고 있다”며 “하드웨어 중심의 점포 경쟁을 넘어 콘텐츠와 경험 중심의 차별화 전략이 중요해지고 있다”고 귀띔했다.
현정민 기자 mine04@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