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이후 전쟁은 인류문명사에 중요한 국면을 만들어내곤 한다. 1871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은 영국이 발명한 증기기관차가 현대인의 시간 관념을 확 바꿔주는 계기가 됐다. 프로이센 곳곳에 철로를 깔고 분과 초 단위로 기차 시간을 편성했기에 프로이센 군대는 일찌감치 프랑스 군대가 도착하기도 전에 작전 지역에서 전투 준비를 완벽히 끝내놓은 상태에서 전투에 임했다. 연전연승 끝에 프로이센은 프랑스의 항복을 받아낸 후 파리 베르사유 궁전에서 북부 독일의 여러 나라들을 통일한 독일제국 건국을 선포했다. 하지만 승패보다 이 전쟁은 많은 문명국에 기차와 시간 관념을 도입하게 되는 계기로 작용했다.
20세기 중반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병력 및 군수품 운송이나 전투에서 탱크와 비행기, 그리고 트럭 등 휘발유를 연료로 한 운송수단이 일반화됐다. 여기에 공수부대 낙하산에 방수가 되고 튼튼해 잘 끊어지지 않는 석유 가공품인 플라스틱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석유는 연료로서뿐만 아니라 제품 원료로 널리 사용되는 필수 원자재가 됐다.
화석연료로 인한 탄소 배출과 플라스틱으로 인한 환경오염 문제를 제외한다면 공교롭게도 전쟁이 산업의 효율성을 높이거나 인류에게 진보를 가져다주는 경우가 종종 있다. 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기 10여년 전 요동반도에서는 러시아와 일본의 육군이 서로를 향해 당시 기관총이라는 신무기를 도입해 사용했다. “돌격! 앞으로”라는 명령과 함께 행하던 전통적인 공격 방식으로 전선을 향해 뛰어든 병사들은 모조리 기관총 화망에 걸려 고기처럼 분쇄되고 말았다. 10년 후 서구 각국은 참호를 파고 기관총에 대적했지만 참호 밖으로 나가 돌격하는 보병 병사들은 모조리 사망하고 말았다. 어리석게도 영국, 프랑스, 독일 지휘관 모두 러일전쟁을 뻔히 보고서도 병력 수로만 밀어붙이려다 전선은 수년간 교착 상태에 빠지고 만다. 뒤늦게 탱크 등이 개발되면서 전쟁의 양상은 바뀌게 된다.
21세기 들어 전쟁의 양상은 다시 한 번 바뀌고 있다. 피터 틸이란 인물이 여기서 등장한다. 그는 2001년 9.11 테러 이후 2년이 지나 새로운 기업을 설립했다. 평소 영국 작가 J.R.R. 톨킨의 판타지 소설로 영화로도 만들어진 ‘반지의 제왕’을 즐겨 읽었던 피터 틸은 이 작품에 등장하는 ‘팔란티어’라는 돌에서 착안해 팔란티어 테크놀로지를 창업한다. 소설과 영화에도 모두 등장하는 팔란티어는 마법구슬인데 모든 것을 궤뚫어볼 수 있다. 피터 틸은 9.11 테러와 같은 비극적인 사건을 사전에 발견해내는 국방 시스템을 염두에 두고 이 회사를 인공지능(AI) 빅데이터 기업으로 키워 미국 국방부와 연결했다.
피터 틸은 페이팔을 창업해 일론 머스크와도 이 회사를 공동 경영한 적이 있고 실리콘밸리의 유명 인사들 사이에서는 리더로 통한다. 페이팔 마피아란 피터 틸과 가까운 IT(정보기술) 인사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피터 틸은 공화당원으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2016 대선 당시 적극적인 지원에 나서기도 했다. 같은 공화당원으로 한 때 자신의 회사에서 일했던 인물이자 트럼프 대통령에게 비판적이었던 J.D. 밴슨을 트럼프 대통령에게 소개한 인물이기도 하다. 피터 틸은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 부통령이 된 밴슨을 위시해 페이팔 마피아 일원들을 곳곳에 포진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피터 틸이 설립한 팔란티어 테크놀로지는 이라크 전쟁,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에 이어 최근 미국-이란 전쟁에서도 최고의 효과를 거둔 것으로 알려졌다. AI 데이터를 활용한 분석 소프트웨어를 통해 적의 위치부터 전장 상황까지 빠르고 효율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도구를 제공하는 팔란티어 테크놀로지는 앤트로픽이라는 또 다른 기업의 AI 언어 모델인 클로드를 활용한 도구를 제공해 미국과 이스라엘이 첫 공격으로 이란 지도자 알리 호세인 하메네이를 제거하게 했다.
미국 국방부는 클로드의 무제한 사용을 요구했고 앤트로픽은 이를 거부했다. 미국 정부는 이에 대한 보복 조치로 앤트로픽을 공급망 위험 업체로 지정했다. 영리를 추구하는 기업으로서는 용감한 행동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번 전쟁이 AI의 군사 활용에 대한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는 점이 점점 분명해지면서 우려가 커지고 있다. AI도 결국 어떤 이들이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중요한데 이런 혁신 첨단 기술이 전쟁에 사용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어찌보면 넘어선 안될 선을 넘고 있는 게 아닌지 걱정스럽다.
<한준호 산업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