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열풍을 타고 고대역폭메모리(HBM) 등 첨단 반도체 산업은 역대급 호황을 누리며 국가 수출의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고물가와 고금리 내수 부진을 넘지 못한 전통 제조업체들이 폐업 위기로 내몰리는 극명한 대비가 나타나고 있다.
최근 발표된 산업 지표들은 이러한 양극화를 가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24일 산업통상자원부와 국세청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 수출은 사상 처음으로 7000억달러 시대를 열며 역대 최대인 7097억달러를 기록했다. 수치만 보면 수출 강국의 위용을 되찾은 듯하지만,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반도체에 대한 의존도가 기형적으로 높다.
지난해 반도체 수출액은 전년 대비 22.2% 급증한 1734억달러로 전체 수출의 약 24%를 차지했다. 특히 지난달에는 월간 수출액이 251억6000만달러까지 치솟았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메모리 3사가 AI 서버용 고대역폭메모리(HBM) 생산에 설비를 집중하면서 스마트폰과 노트북용 범용 D램 공급이 급감해 가격이 상승한 것으로 풀이된다. 특히 지난달 반도체 수출은 1년 전보다 160% 이상, 전월보다는 30% 가까이 늘어났다. 설 연휴로 조업일수가 줄었지만 전체 수출은 2월 기준 역대 최대 실적이다. 단일 품목으로 전체 수출의 34.7%를 차지하며 반도체 쏠림 현상은 더욱 심화되는 양상이다.
반면 전통 제조업의 기둥인 철강과 석유화학 산업은 깊은 수렁에 빠져 있다. 지난해 기준 철강 제품 수출은 전년 대비 4.5% 감소했으며, 석유 제품 역시 9.4% 줄어들며 역성장의 늪을 벗어나지 못했다. 글로벌 경기 둔화와 중국의 저가 공세에 직격탄을 맞은 것이다. 일반기계 산업 또한 설비투자 부진 여파로 최근 월간 수출액이 16% 이상 뒷걸음질 치는 등 고전하고 있다. 반도체 호황이 만들어낸 ‘수출 플러스’라는 지표가 낙수효과로 이어지지 못한 채 특정 산업만 비대해지고 나머지는 위축되는 경제 구조의 불균형이 심화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양극화가 생존의 갈림길로 직결되고 있다. 반도체 산업은 자본 집약적이고 자동화율이 높아 수출 증가가 고용 창출로 이어지는 속도가 더디다. 반면 노동 집약적인 성격이 강한 전통 제조업의 몰락은 대규모 실업과 지역 경제 붕괴라는 사회적 비용을 초래하고 있다.
국가데이터처의 2024년 지역소득에 따르면 지역내총생산(GRDP)의 서울·경기 등 수도권 집중도는 47.89%로 역대 네 번째를 기록했다.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경제 격차가 다시 벌어지고 있다는 의미다. K자의 윗줄을 타는 첨단 산업과 아랫줄로 추락하는 전통 산업 사이의 간극이 벌어질수록 사회적 갈등과 경제적 불안정성은 증폭될 수밖에 없다. 정부와 금융권의 정책적 배려 역시 반도체와 전략 산업에 집중되면서 전통 제조업체들의 소외감은 더욱 커지고 있다.
해외 주요 투자은행(IB)들도 “한국의 테크 산업이 성장세를 주도하는 반면 비(非)테크 부문은 글로벌 경기 둔화의 여파로 침체의 그늘에 머물고 있다”고 진단했다. 골드만삭스는 지난달 국제금융센터가 공개한 보고서에서 “철강, 석유화학, 소비자 가전, 전기차 산업 등에서 과잉 공급 문제가 지속되며 수익성이 악화되고 있다”며 “성장의 과실이 대형 테크 기업에 집중되며 특히 중소기업의 경기 심리지수가 여전히 장기평균을 밑돌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어 “이로 인해 전체 수출 증가세에도 제약이 발생하고 있다”며 “테크 산업의 호황이 주로 가격 상승에 기반하고 있고 관련 기업들이 국내보다 해외에 더 많은 투자를 진행하면서 낙수효과가 제한적일 수 있다”고 내다봤다. 이에 따라 범국가적 차원에서 전통 제조업의 디지털 전환을 지원하고, 고부가가치 산업으로의 업종 전환을 돕는 구체적인 로드맵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현정민 기자 mine04@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