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디지털 자산을 기존 금융시장 안으로 끌어들이는 제도 개편이 속도를 내면서 우리나라도 법인·기관의 시장 참여를 확대하고 글로벌 규제 흐름과 보조를 맞춰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단순히 법인의 가상자산 거래를 허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수탁과 내부통제, 투자자 보호를 아우르는 제도적 기반을 함께 구축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28일 금융권에 따르면 미국과 일본 등 주요국은 디지털자산을 기존 금융상품·금융회사 규제 체계와 연결하는 방향으로 제도화를 추진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김현정·안도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주최한 ‘법인시장 개방과 안전한 디지털자산 생태계 구축을 위한 학술 콘퍼런스’에서 이같은 ‘글로벌 정합성’ 확보가 주요 과제로 제시됐다.
글로벌 정합성은 미국·일본·유럽연합(EU) 등에서 만들어지는 디지털자산 법제와 규제 기준을 국내 제도에도 합리적으로 반영하는 것을 뜻한다. 국내 규제가 해외와 지나치게 동떨어질 경우 국내 자금과 관련 산업이 해외 시장으로 이동하는 반면, 제도권 금융회사의 신사업 진출은 제약될 수 있다는 문제의식이 깔려 있다.
◆美 ETF·수탁 확대, 日 금융상품 편입…제도권 진입 속도
가장 앞선 사례는 미국으로, 미국에서는 2024년 비트코인 현물 상장지수펀드(ETF) 출시를 시작으로 블랙록과 피델리티, 그레이스케일 등 주요 자산운용사들이 비트코인·이더리움 현물 ETF 시장에 잇따라 진입했다. 기존 금융시장 투자자가 증권계좌와 ETF라는 익숙한 틀 안에서 제도권 금융과 디지털자산 시장 간 접점도 크게 넓어졌다.
최근에는 ETF를 넘어 은행권의 수탁 인프라도 확대되고 있다. 미국 U.S뱅코프는 기관투자자를 대상으로 비트코인 수탁 서비스를 재개하면서 수탁 범위를 비트코인 ETF까지 넓혔고 씨티그룹도 기관 대상 디지털자산 수탁과 스테이블코인 결제, 암호화폐 ETF 자산 관리 서비스를 준비하고 있다. 미국 통화감독청(OCC)은 지역은행 등이 스테이블코인 발행사와 제휴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도 마련했다.
일본은 디지털자산 자체의 법적 성격과 세제를 기존 금융투자상품에 가깝게 바꾸는 데 초점을 맞췄다. 일본 금융청은 디지털자산 규제의 근거법을 자금결제법에서 금융상품거래법으로 옮기고 디지털자산 거래업에 원칙적으로 제1종 금융상품거래업 수준의 규율을 적용하는 제도 개편을 추진하고 있다.
◆韓 법인시장 개방 앞두고 커스터디·2단계 입법 병행해야
해외사례를 법인시장 개방을 앞둔 한국에도 시사점을 준다. 국내 금융회사와 가상자산사업자의 관계는 2021년 실명확인 입출금계정 제공에서 출발했지만 최근에는 수탁, 토큰증권(STO), 지분투자 등으로 빠르게 확장되고 있다. KB국민은행과 KODA, NH농협·신한은행과 KDAC 등 금융권이 이미 디지털자산 수탁 인프라 구축에 참여한 것도 법인·기관시장 확대를 위한 기반으로 꼽힌다.
이에 따라 9년 만에 이른바 ‘금가분리’(금융과 가상자산의 분리) 규제를 완화해 법인의 디지털자산 시장 참여 길을 넓히는 것과 함께 커스터디와 내부통제 체계를 정교하게 갖춰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해외에서도 기관 참여 확대와 동시에 사이버보안과 기술 리스크, 국가 간 규제 차이에 대응하기 위한 내부통제와 위험관리 고도화가 핵심 과제로 제시되고 있다.
법인시장 개방을 시장 활성화로 연결하려면 제도적 불확실성을 줄이는 2단계 입법도 서둘러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김갑래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발행인의 자격을 국내외 법인으로 제한하고, 발행인 공시의무와 사업자의 진입·행위 규제, 자율규제와 스테이블코인 규율 등을 법제화해야 한다”며 제2단계 입법을 통한 규제 체계 정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홍지연 자본원 선임연구원은 전통 금융과 디지털자산 산업의 결합이 본격화하는 흐름이 금융회사의 수익원 다변화와 디지털 금융 경쟁력 강화에 기여할 수 있지만, 디지털자산의 높은 변동성이 금융회사로 전이되거나 스테이블코인의 준비자산·유동성 문제가 금융시장 위험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디지털자산 제도화 과정에서 수탁과 투자자 보호, 이해 상충 방지 등을 함께 정비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주희 기자 jh224@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