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배우 최불암 별세] “따뜻한 사람이 큰 일을 합니다”…최불암 포스터에 남은 정·재계 인연

배우 최불암(본명 최영한)이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서울 영등포을에 신한국당 후보로 출마할 당시 사용한 선거벽보. 1992년 통일국민당 전국구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한 그는 이 선거에서 재선에 도전했다. 사진=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거박물관
배우 최불암(본명 최영한)이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서울 영등포을에 신한국당 후보로 출마할 당시 사용한 선거벽보. 1992년 통일국민당 전국구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한 그는 이 선거에서 재선에 도전했다. 사진=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거박물관

 

“따뜻한 사람이 큰 일을 합니다!”

 

푸른 바탕에 환하게 웃는 얼굴, 붉은색 기호 1번, 그리고 ‘최영한’이라는 이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거박물관에 남아 있는 1996년 제15대 총선 벽보다. 시청자에게는 ‘전원일기’의 김 회장이자 ‘수사반장’의 박 반장으로 익숙한 배우 최불암이 본명으로 유권자 앞에 섰다. 신한국당 후보로 서울 영등포을에 출마했을 때다.

 

지난 29일 세상을 떠난 고인의 이력에는 배우와 방송인 외에 국회의원이라는 직함도 있었다. 다만 이 벽보는 정치 신인의 출사표가 아니다. 1992년 통일국민당 전국구 의원으로 국회에 입성한 뒤 지역구에서 재선에 도전하던 시기의 기록이다. 그가 정치로 향한 길을 거슬러 올라가면 현대그룹 창업주 정주영 명예회장과 만난다.

 

두 사람의 교분을 깊게 한 작품은 ‘전원일기’였다. 농촌에서 자란 정 명예회장은 농사와 농촌 이야기에 관심이 많았고, 양촌리의 일상을 그린 드라마를 아꼈다. 최불암에게 지게 지는 법을 직접 설명해준 일화도 있다. 최불암은 2023년 tvN STORY ‘회장님네 사람들’에서 정 명예회장이 목을 당겨야 지게의 중심이 잡힌다고 가르쳐줬다고 회고했다.

 

드라마에 직접 나서고 싶어 했다는 이야기도 최불암이 전했다. 정 명예회장이 출연할 시간을 내달라고 요청했고 실제 출연도 논의됐지만, 임원들의 만류로 성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기업 총수와 인기 배우의 만남에는 농촌이라는 공통의 화제가 있었다.

 

정치 입문 이전부터 함께한 모습은 사진으로도 남아 있다. 현대자동차그룹이 운영하는 아산 정주영 기념관에는 1989년 문화예술인들의 알래스카 여행 사진이 실려 있다. 최불암은 황금찬 시인, 배우 강부자, 김수현 작가 등과 함께 정 명예회장 곁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1992년 창당을 앞두고 급하게 맺어진 인연은 아니었던 셈이다.

 

최불암이 기억한 정 명예회장에게는 소탈한 면모도 있었다. 2011년 신동아 인터뷰에서는 청운동 자택의 낡은 소파와 손때 묻은 살림살이를 떠올렸다. 거대한 기업을 이끈 인물의 일상에서 검소함을 봤다는 회고였다.

 

이런 교분은 1992년 통일국민당 창당으로 이어졌다. 최불암이 2011년 한국일보에 털어놓은 회고에 따르면, 그해 초 정 명예회장은 전화를 걸어 창당 발기인 명단에 이름을 넣겠다고 했다. 당시 드라마 촬영차 일본에 다녀왔더니 자신의 이름이 신문 문화면 대신 정치면에 올라 있었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국회의원을 하겠다는 생각은 아니었다고 했다. 정 명예회장을 돕는 마음으로 행사에 참석하고 연단에 섰는데, 어느새 전국구 후보 4번이 돼 있었다는 설명이다. 아내 김민자는 정치 참여를 만류했고, 주변에는 무대를 지키라는 조언도 있었다고 돌아봤다. 친분에서 시작한 참여가 실제 의정 활동으로 이어진 것이다.

 

국회에서는 문화 현장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고 회고했다. 배우로 일하며 바뀌어야 한다고 느낀 점들을 제도 안에서 풀어보려 했지만, 현장의 언어를 행정에 전달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는 것이다. 장관에게 ‘장관님’이라고 호칭했다가 동료 의원에게 지적을 받았다는 일화도 남겼다. 의정 활동을 돌아보는 그의 이야기에는 국회의 낯선 관행을 마주한 배우의 시선이 담겨 있다.

 

정주영이 정치 입문의 계기였다면, 재선 도전의 배경에는 김영삼 당시 대통령의 권유가 있었다. 최불암은 2011년 신동아 인터뷰에서 정치를 그만두겠다는 뜻을 밝혔지만 김 대통령이 다시 출마하도록 설득했다고 말했다. 그 사이 소속 정당은 통일국민당에서 민자당으로 바뀌었다. 이후 신한국당 소속으로 나선 1996년 총선에서 만난 상대가 새정치국민회의 김민석 후보였다.

 

당시 김 후보는 서울대 총학생회장 출신의 젊은 정치인이었다. 국민적 인지도를 지닌 현역 의원 최불암을 상대로 내세운 구호는 ‘최불암은 무대로, 김민석은 국회로’였다. 상대의 배우 경력을 존중하면서 자신에게 의정 활동의 기회를 달라는 호소였다. 선거에서는 김 후보가 승리했고, 최불암의 재선 도전은 낙선으로 끝났다.

 

최불암 자신도 낙선을 원망하는 말로 기억하지 않았다. 2011년 신동아 인터뷰에서는 자신을 무대에서 보고 싶어 일부러 투표하지 않았다는 유권자의 말을 전하며, 그에게 “고맙다”고 답했다고 했다. 자신을 배우로 아껴준 마음으로 받아들였다는 이야기다.

 

배우 최불암이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을 모델로 한 MBC 드라마 ‘영웅시대’에서 열연을 펼치고 있다. MBC 영상 화면
배우 최불암이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을 모델로 한 MBC 드라마 ‘영웅시대’에서 열연을 펼치고 있다. MBC 영상 화면

 

정치 무대를 떠난 뒤에도 정 명예회장과의 인연은 작품으로 이어졌다. 2004년 MBC 드라마 ‘영웅시대’에서는 정 명예회장을 모델로 한 기업인 천태산을 연기했다. 당시 매일경제 인터뷰에서 최불암은 특유의 말투를 살리기 위해 자료를 살펴봤다며, 강원도 사투리와 서울 말투가 섞이고 문장 끝의 억양이 올라가는 특징을 설명했다. 오랫동안 알고 지낸 기업인의 모습이 배우의 연기로 옮겨졌다.

 

배우 최불암(맨 오른쪽)이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을 모델로 한 MBC 드라마 ‘영웅시대’에서 열연을 펼치고 있다. MBC 영상 화면
배우 최불암(맨 오른쪽)이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을 모델로 한 MBC 드라마 ‘영웅시대’에서 열연을 펼치고 있다. MBC 영상 화면

 

그리움은 세월이 흘러도 이어졌다. 2021년 3월에는 서울 종로구 현대건설 사옥에서 열린 정 명예회장 20주기 추모 사진전을 찾았다. 생전에 가까운 사이여서 방문했다고 밝힌 그는 젊은 세대가 정 명예회장의 도전정신을 배웠으면 한다는 뜻도 전했다. 방명록에는 “그리웠던 옛날이 여기에 있었습니다. 존경은 영원합니다”라고 적었다.

 

벽보의 ‘따뜻함’을 돌아보게 하는 이력은 또 있다. 초록우산에 따르면 1985년 최불암을 전국후원회장으로 하는 전국후원회가 결성됐다. 선거벽보에도 한국복지재단 후원회장이라는 경력이 적혀 있다. 국회의원에 도전하기 전부터 아이들을 돕는 일에 참여했던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그의 국회 생활은 한 차례 임기로 마무리됐지만 기업인과 나눈 오랜 교류, 선거 상대에게 남긴 격려, 아이들을 위한 후원은 정치인 최영한의 이력 밖에서도 이어졌다”고 말했다.


김재원 기자 jkim@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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