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급화·세계화도 좋지만… 자취 감춘 ‘순우리말 브랜드’

상위 10위 건설사 중 순우리말 '0'… ‘외래어=고급’ 인식 고착
자동차·금융·패션·스포츠도 같은 상황… 해외수출 유리 반론도

1. 시공능력평가 상위 10위 대형 건설사들은 고급화 전략으로 외래어 브랜드 아파트를 내세우고 있다. 사진은 삼성물산 ‘래미안’ 아파트 전경. 삼성물산 제공

[세계비즈=박정환 기자] ‘써밋’, ‘포레나’, ‘라이킷’, ‘펠리세이드’, ‘이니스프리’, ‘라네즈’…

 

이름만 보면 의미를 짐작조차하기 어려운 외래어 브랜드(상표)가 난립하고 있다. 건설, 자동차, 금융, 패션, 식품, 스포츠 등 사회 전 분야에서 순우리말 상표는 찾아보기 힘들다. 심지어 공공기관 명칭도 ‘센텀시티’, ‘옐로우시티’, ‘브라이트센터’ 등 기상천외한 외래어가 수두룩하다.

 

글로벌 시대에 순우리말 사용을 강조하는 것은 구시대적이라는 반론도 있지만 현재 산업계의 외래어 사용 실태는 정도가 지나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이는 1970년대 이후 급속한 경제 발전 과정에서 ‘외국어=세련되고 고급스럽다’는 인식이 자리 잡았고, 대기업들이 고급화·세계화 전략의 일환으로 잇따라 유명 한자나 외래어 브랜드를 내세운 데 따른 결과다.

 

특히 건설업계의 경우 유명 브랜드 대부분이 외래어 또는 한자다. 순우리말 브랜드는 부영그룹의 ‘사랑으로’, 금호건설 ‘어울림’, 코오롱건설 ‘하늘채’ 등으로 손에 꼽을 정도다.

 

올해 시공능력평가 상위 10위 이내 대형 건설사 브랜드 중 현대건설·현대엔지니어링의 ‘디 에이치’와 ‘힐스테이트’, 대림산업 ‘아크로’, GS건설 ‘자이’, 포스코건설 ‘더샵’, HDC현대산업개발 ‘아이파크’, 롯데건설 ‘롯데캐슬’과 ‘르엘’, SK건설의 ‘SK뷰’ 등은 모두 외래어다. 또 삼성물산 ‘래미안(來美安)’은 한자어, 대우건설의 ‘푸르지오’는 순우리말인 푸르다와 ‘공간’을 뜻하는 지오(geo)의 합성어다.

 

중견 건설사도 상황은 비슷하다. 외래어 브랜드로는 호반건설의 ‘베르디움’과 ‘호반써밋’, 태영건설 ‘데시앙’, 효성중공업 ‘해링턴 플레이스’, 두산건설 ‘위브’와 ‘더 제니스’, 쌍용건설 ‘더 플래티넘’, 한라 ‘한라비발디’, 서희건설 ‘스타힐스’ 등이 있다.

 

우미건설 ‘우미린’의 린은 한자어 ‘이웃 린(隣)’에서 따왔다. 반도건설의 브랜드 유보라는 특이하게 권홍사 회장의 장녀인 권보라 씨의 이름에서 따온 한자어로 ‘딸을 키우는 마음으로 아파트를 짓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은형 건설정책연구원 책임연구원은 “2000년 전후 래미안과 자이를 필두로 아파트에 한자나 외래어 브랜드를 붙여 고급화·차별화하는 전략이 유행하기 시작했다”며 “순우리말은 촌스럽고, 외래어는 더 있어 보인다는 인식 탓에 외래어 단지명이 대세가 됐지만 향후 이 같은 인식이 점차 바뀔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외래어 브랜드가 인기를 끌자 특정 명칭을 선점하기 위한 경쟁도 치열해졌다. 호반건설은 2010년부터 ‘호반써밋플레이스’라는 브랜드를 사용해왔는데, 4년 뒤인 2014년 대우건설이 고급화 전략으로 프리미엄 브랜드인 ‘푸르지오써밋’을 론칭하며 두 건설사 간 신경전이 벌어졌다. 그 후엔 다시 호반건설이 ‘호반써밋’으로 브랜드를 리뉴얼하면서 맞불을 놓기도 했다.

 

자동차업계에서도 순우리말 브랜드는 찾아보기 힘들다. 현재 도로 위에서 볼 수 있는 자동차 중 한글 명칭은 2005년 단종된 쌍용자동차의 ‘무쏘’가 유일하다. 무쏘는 코뿔소의 순우리말인 ‘무소’를 경음화한 것이다. 그 이전엔 대우자동차 ‘에스페로’의 후속모델인 ‘누비라(이리저리 거리낌 없이 다니다는 뜻)’가 있었다.

 

금융업계에서도 외래어 브랜드가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다. 예컨대 신용카드의 경우 ‘더유’, ‘더 베스트’, 스타맥스’, ‘아멕스 그린’ ‘베브’ 등 외래어 명칭이 대부분이다. 반면 KB국민카드의 프리미엄 라인인 ‘가온’은 ‘세상의 중심’이라는 순우리말이다.

 

일각에선 원활한 해외 진출을 위해 외래어 브랜드 사용이 불가피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한 대기업 홍보팀 관계자는 “해외 소비자들에게 익숙한 언어, 단어의 제품과 브랜드가 수출에 유리한 게 사실”이라며 “순우리말 상표는 당연히 좋지만 그렇다고 내수용과 수출용 브랜드명을 따로 짓는 것은 재정적·행정적 낭비라 이를 통합할 수 있는 외래어 브랜드를 선호하는 편”이라고 말했다.

 

pjh1218@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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