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원 기자] 부산 아난티 코브 수영장에 버버리의 TB썸머 모노그램이 펼쳐졌다. 이곳 야외 수영장 3곳의 파라솔, 선베드, 쿠션, 아동 구명조끼 등에 이르기까지 특유의 모노그램 일색이다.
이는 버버리가 한달간 선보이는 테이크오버 행사의 일환으로 기획됐다. 모노그램 자체가 버버리 창립자 토머스 버버리의 이니셜인 T와 B를 패턴화한 것으로 브랜드 유산을 담고 있다. 파란 수영장과 대비되는 특유의 패턴은 소비자들에게 강한 브랜드 이미지를 남길 것으로 보인다. 어디서 사진을 찍어도 럭셔리한 분위기가 연출돼 ‘인스타그래머블’하다.
럭셔리 패션 브랜드들이 소비자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 콧대 높거나, 고상한 이미지 대신 ‘당신이 원하는 삶의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의지를 강력하게 내비친다.
18일 패션업계에 따르면 이는 최근 2030세대가 ‘명품 큰손’으로 떠오르면서 생긴 변화다. 경험을 중시하는 요즘 소비자들에게 브랜드의 이미지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을 적극 마련하겠다는 의지다.
올 상반기 키워드는 ‘전시’와 ‘리빙’, ‘레스토랑’이다. 다양한 팝업 행사를 통해 신상 가방이나 의류를 보여주는 대신 브랜드가 원하는 이미지를 담은 공간이나 기획전시를 앞세운다. 브랜드 철학을 음식으로 풀어내기도 한다. 올해에만 구찌·루이비통 등 럭셔리 브랜드 2곳이 새로운 자사 이름을 걸고 레스토랑을 운영했다. 버버리도 최근 성수동 ‘타임애프터타임’에서 한달간 콜라보 카페 메뉴를 열었다.
이들은 접근성인 높은 요소보다 일상에서 ‘친숙한 것’에 브랜드 색을 입혔다. 올 초 에르메스의 ‘전이의 형태’ 전시를 시작으로 까르띠에, 루이비통, 예거 르쿨트르, 생로랑, 르메르 등은 국내서 눈에 띄는 전시를 기획했다. 제품이나 브랜드 역사를 전면에 내세우며 직접 홍보했던 과거 스타일과 확연히 달라졌다.
루이비통은 지난달 서울 청담동 송은에서 ‘루이비통 오브제 노마드’ 무료 전시회를 열고, 세계의 거장들과 협업한 자사 가구 컬렉션을 선보였다. 이를 통해 패션분야뿐 아니라 리빙 분야까지 아우른다는 점을 확실히 각인시켰다. 당시 무료로 열린 전시회는 티켓 오픈과 동시에 금세 매진을 기록했다.
생로랑도 지난달 세계 7개국에서 ‘셀프 프로젝트-SELF 07’ 사진 전시를 기획해 호응을 얻었다. 각국 참여 아티스트들이 ‘SELF’라는 키워드를 통해 패션을 비롯한 문화적 요소를 사진으로 표현, 브랜드 가치를 알렸다.
국내서는 남산서울타워 팔각정에서 무료 전시를 열어 화제가 됐다. 다만 전시 장소가 시민을 위한 공공장소인 만큼 브랜드 측이 서울시와 여러 차례 협의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이 프로젝트 역시 네이버 사전 예약이 하루 만에 모두 매진됐다.
크리스챤 디올 뷰티는 현재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는 프랑스 현대미술가 ‘장 미셸 오토니엘’의 개인전 ‘장-미셸 오토니엘: 정원과 정원’을 공식 후원하고 있다. 브랜드 측에 따르면 이는 디올 문화정원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이 전시는 최근 MZ세대 사이에서 꼭 둘러볼 만한 콘텐츠로 떠오르고 있다.
요즘 럭셔리 브랜드들은 SNS 활용에도 적극적이다. 과거 ‘프라이빗’에 주목했다면 이제는 소비자들에게 소장욕구를 일으키는 인플루언서와의 협업이 무척 중요해졌다. 이같은 전시나 팝업스토어를 기획하면 대대적인 홍보 대신 ‘인플루언서 초청 카드’를 꺼낸다. 이들을 통해 SNS에 행사에 대한 힙한 콘텐츠로 채워 대중의 이목을 끈다.
또 하나의 특징은 전시 기간이 길지 않다는 것. 대체로 중소형 갤러리에서 1주일 정도 ‘짧고 굵게’ 운영한다. 길어야 한 달 정도다. 패션업계 관계자는 “요즘 소비자들은 제품도 ‘한정판’에 열광하듯, 행사도 너도 나도 가는 게 아닌 ‘희소성이 있고 프라이빗한 것’을 선호하는 추세”라고 했다.
업계에 따르면 럭셔리 브랜드들의 이같은 행보는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브랜드가 추구하는 라이프스타일을 보여주는 공간으로 기획 전시나 팝업 스토어가 이어질 것이라는 분석이다. 특히 명품에 대한 수요가 커진 요즘, ‘럭셔리 브랜드가 기획하는 공간’을 찾으려는 니즈도 무척 크다.
패션업계 관계자는 “옷이나 특정 상품에 국한되지 않고 일상 전반에서 브랜드를 녹여내겠다는 업계의 의지가 드러나는 것”이라며 “당장 소비자가 제품을 구매하지 않더라도 브랜드를 체험하며 친밀감이 높아지면 결과적으로 브랜드 입장에서는 긍정적인 요소가 된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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