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은 중국의 정치 지도자 덩샤오핑이 남긴 유명한 어록이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의미로, 실용주의적 개혁·개방정책을 향한 의지를 담고 있다. 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인민을 잘 살게 하는 정책이 제일이라는 게 덩샤오핑의 지론이었다.
그는 자본주의를 표방한 경제 체제에서도 계획경제가 있듯이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시장 경제가 공존할 수 있다는 점을 주창했다. 적극적인 개혁·개방 정책을 통해 당시 ‘정치 제일주의’에 빠졌던 마오쩌뚱 시대를 극복하며 사회주의에 기초를 둔 시장경제 체계의 토대를 놓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실용을 강조한 한 정치 지도자가 100년 넘게 아시아의 병자로 전락했던 중국을 일깨운 것이다.
중국의 실리콘밸리로 탈바꿈한 선전(심천)은 실용주의 정책의 대표적 성과다. 중국 증시 시가총액 1위 기업인 텐센트를 비롯해 전 세계 전기차와 드론 산업을 각각 이끄는 비야디와 DJI 등 주요 테크기업의 본사가 이 곳에 위치해 있다. 선전의 급성장은 1980년 광둥성 경제특별구역 조례를 통해 이 지역을 경제특구 1호로 지정하면서 시작됐다. 선전은 어느덧 상하이와 베이징 다음으로 중국의 가장 부유한 도시로 탈바꿈했다. 철저히 실용에 입각한 개혁·개방 정책 덕이다.
한국 경제가 백척간두에 서 있다. 가뜩이나 저출산·고령화, 신성장동력 부재, 취약한 내수 시장 등 구조적 문제가 심각한데, 12·3 비상계엄 사태와 그에 따른 대통령 탄핵 등 국정혼란기로 반 년 넘게 절뚝거렸다. 올해 1분기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0.2%를 기록하며 3분기만에 재차 마이너스로 돌아섰다. 조기 대선을 앞둔 국면에선 정부의 재정 집행도 멈췄다. 정치 혼란이 지속한 틈을 타 식품업계는 약속이나 한 듯 제품 가격을 크게 올렸다.
어디 이뿐인가. 미래 먹거리 발굴 및 투자를 위한 골든타임도 놓쳤다. 인공지능(AI), 바이오, 항공우주 산업 등 미래 산업을 향한 전 세계적 경쟁이 한창인데, 우리는 제대로 된 산업 육성책조차 수립하지 못했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는 관세율을 높이겠다며 으름장을 놓고 있지만, 외교 채널은 스톱 상태였다.
이럴 때일수록 새로 출범한 정부에 실용주의적 정책이 절실하게 요구된다. 이재명 대통령은 취임선서에서 “이념을 배제하고 실용에 입각한 정책을 펴겠다. 유연한 실용정부가 되겠다”고 강조했다. 이는 후보 시절부터 강조해온 이른바 ‘먹사니즘’, ‘잘사니즘’의 연장선상으로 보인다. 민생을 챙기기 위해 실용주의적인 정책에 집중하자는 의미다.
외교 통상분야에서도 실용주의는 경제 교류를 강화하기 위한 필수 요소다. 지정학적 안정성을 확보하는 게 안보리스크를 낮추고 경제 협력의 실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방안이기 때문이다. 특히 미·중 갈등 속 통상으로 먹고 사는 한국의 현명한 대응도 중요하다. 지난해 대중 수출액은 1330억 달러, 대미 수출액은 1278억 달러로 엇비슷해서, ‘빅2’ 모두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게 필수다. 대표적 통상국가인 한국으로선 국부를 극대화할 수 있다면 교역국이 어떤 이념과 체제를 갖고 있는지 따질 필요가 없다.
신정부는 재벌 대기업과 개인 소액주주간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기 위한 상법 개정에 힘쏟으면서도 산업계가 신정부에 내놓은 성장촉진 동력 마련, 경제영토 확장 등의 제언에도 귀기울여야 한다. 이 대통령은 후보 시절 경제 5단체를 만나 “창의적이고 능동적인 기업 활동을 보장하고, 우리 기업인들이 자유롭게 창업하고 성장하며 세계 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도록 정부가 든든하게 뒷받침하겠다”고 약속한 걸 결코 잊어선 안 된다. “박정희 정책도, 김대중 정책도 필요하고 유용하면 구별 없이 쓰겠다”는 신임 대통령의 취임 일성을 온 국민이 예의주시하고 있다.
오현승 기자 hsoh@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