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달러 환율이 1550원선을 넘나들며 연일 연고점을 경신하자 금융권에 비상이 걸렸다. 시장 일각에서는 ‘환율 1600원 시대’가 현실화할 수 있다는 우려마저 나온다. 미국의 통화정책 긴축 우려와 국내 증시에서의 외국인 자금 이탈이 맞물리면서, 금융지주와 은행들은 비상대응체계를 가동하며 건전성 관리에 착수했다.
◆유독 약한 원화…미 매파적 선회와 ‘셀 코리아’가 주원인
5일 서울 외환시장에 따르면 원·달러 환율은 지난 1일 장중 1559.10원까지 치솟으며 2009년 3월 이후 17년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 올해 상반기 원·달러 환율 평균값은 1484.6원으로, 외환위기 당시인 1998년 상반기(1493.1원) 이후 28년 만에 최고치다. 올해 2분기 평균은 1501.6원으로 1998년 1분기(1596.8원) 다음으로 높은 수준이다.
국제 금융시장에서 달러 인덱스가 비교적 안정적인 흐름을 보임에도 유독 원화가 약세를 면치 못하는 것은 대내외적 수급 불균형 탓이다.
가장 큰 요인은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의 통화 긴축 선호 분위기다. 케빈 워시 의장 취임 이후 시장에서는 연내 추가 금리 인상 확률을 50% 이상으로 점치고 있다.
여기에 국내 증시에서 외국인 투자자들이 자금을 빼내는 ‘셀 코리아’ 현상이 심화됐다. 외국인은 코스피 시장에서 대규모 순매도를 이어가고 있으며, 올해 상반기에만 148조원 규모를 순매도해 반기 기준 역대 최대치를 갈아치웠다.
국민연금과 개인 투자자의 역대급 해외 주식 투자 붐도 원화 가치를 떨어뜨리는 요인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최근 환율 상승 요인의 약 70%가 가계 및 기관의 해외투자 증가에 따른 달러 수요 집중으로 분석됐다.
과거처럼 기업이 수출로 벌어들인 달러가 국내에 머물지 않고 곧바로 해외 자산 매입으로 빠져나가는 구조적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외환위기 이후 최고치…금융권 하반기 전략회의 총력
최근 하반기 경영전략회의에 돌입한 금융권의 화두는 ‘고환율 리스크 대응’과 ‘자본적정성 사수’다. 환율이 10원 오를 때마다 보통주자본(CET1) 비율은 약 0.01~0.03%포인트 하락한다. 이에 따라 신한·KB·우리금융그룹 등은 환율 1600원대 진입을 가정한 최악의 시나리오별 비상계획 점검에 착수했다.
시중은행들의 발걸음도 빨라졌다. 우리은행은 환율이 1500원을 돌파한 이후 위기대응협의회를 상시 가동하며 밀착 점검 중이다. KB국민은행은 자본 비율 유지를 위해 위험가중자산이익률(RoRWA) 지표를 활용해 자산 포트폴리오를 조정하고 나섰다. 하나은행 역시 주 단위로 고환율 시나리오별 위험가중자산(RWA) 현황을 시뮬레이션하며 구조적 외환 포지션 노출도 관리를 대폭 강화하고 있다.
◆“1500원대 뉴노멀…1600원 상단 열어두고 대비할 때”
전문가들은 이제 1400~1500원선이 새로운 기준점이 되는 ‘고환율 뉴노멀’ 구조가 굳어졌다고 보고 있다.
박해식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원·달러 환율이 과거 수준으로 빠르게 되돌아가기보다 한 단계 높은 수준에서 유지될 가능성이 크다”며 “고환율 흐름이 일시적 충격에 그치지 않고 구조적으로 상향 이동했기 때문에 국내 금융회사들은 고환율 장기화가 자본적정성에 미칠 영향을 면밀히 점검하고 선제적으로 대비해야 한다”고 분석했다.
단기적인 변동성과 1600원 추가 돌파 여부에 대해서는 미 연준의 금리 행보와 국내 자금 유출 흐름에 달렸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김유미 키움증권 리서치센터 연구원은 외환시장 동향을 진단하며 “미국 통화 긴축 우려의 강도와 국내 정세 현황에 따라 원·달러 환율의 단기 하방 압력이 제한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이어 “외국인 주식 유출과 대외 지정학적 악재가 겹쳐 일시적 폭등이 발생할 경우 상단을 더 열어두고 금융권의 비금융 부문 수익 다변화 등 기초체력 강화에 집중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현정민 기자 mine04@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