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다변화 전략] 21세기의 ‘석유고갈론’… 마르진 않았지만 막혀버렸다

최근 서울 서초구 만남의광장주유소에서 시민들이 주유하고 있다. 뉴시스
최근 서울 서초구 만남의광장주유소에서 시민들이 주유하고 있다. 뉴시스

 

 지구상에서 곧 고갈 될 것이라던 석유는 여전히 마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석유의 이동로가 막히자 마른 것이나 다름없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비상시에 대비해 각국에서 모아둔 비축유가 쓰이면서 동시에 점차 말라가는 것. 1970년대 오일쇼크 당시 전 세계를 뒤숭숭하게 만들었던 ‘석유고갈론’이 약 50년 만에 고개를 드는 형국이다.

 

 22일 정유·에너지 업계에 따르면 지난 2월말 중동에서 발발한 미국-이란 전쟁이 장기화 되고 세계 최대 원유 수출국인 사우디아라비아의 원유 수출에 차질이 빚어지면서 ‘11월 위기설’이 돈다. 중동산 원유의 국내 수급은 갈수록 어려워지는데 수확철 농업용 디젤(경유), 초겨울 난방유 같은 계절적 요인으로 인한 수요 증가가 불가피해 원유 대란이 일어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앞서 로이터 통신과 월스트리트저널 등 외신은 지난 16일 사우디의 핵심 원유 수송 인프라인 동서 송유관을 연결하는 펌프장 두 곳이 드론의 피격을 받아 파손되면서 송유관 가동을 멈췄다고 보도했다. 완전 복구까지 6∼8주가 걸릴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국내 정유업계가 통상적으로 도입 예정 월의 약 2개월 전부터 원유 구매·선적 절차를 진행하는 점을 고려하면 이번 사우디 송유관 파괴에 따른 영향은 11월부터 본격화될 가능성이 높다.

 

 이에 관해 우리 정부는 11월 원유 물량의 70% 이상을 이미 확보했다며 위기설을 일축했다. 양기욱 산업통상부 산업자원안보실장은 지난 18일 “가장 어려웠던 지난 4월 위기 국면과 비교하면 12월까지 국내 수급에 큰 걱정은 없다”며 “사우디 동서 송유관 피격 등으로 인해 불확실성이 생긴 것은 사실이지만 다른 경로를 통해 물량이 빠져나오며 상쇄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중동에서의 전쟁이 앞으로도 계속 이어진다면 수급 불확실성은 확대될 수밖에 없다. 특히 전쟁이 격화되면 석유 이동로 역시 지속적으로 좁아지게 되고 최악의 경우 아예 막힐 수도 있다. 1973년 아랍 산유국이 석유 가격을 약 4배 올리고, 1979년 이란 혁명으로 일일 석유 수출이 급감하며 발생한 오일쇼크가 21세기에 새로운 형태로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약 50년 전 오일쇼크 당시 여러 나라에서는 석유고갈론이 부상했다. 유한한 석유는 생산량이 늘어나 피크 생산량에 도달한 후 점차 감소하다 결국에 고갈된다는 이론이었다. 당시 석유가 30~40년 뒤 고갈될 것이란 주장이 정설처럼 떠돌았다.

 

 하지만 현재까지도 석유는 고갈되지 않았다. 또한 기술의 발달로 채굴할 수 있는 추정 매장량을 가리키는 가채 매장량은 늘어나고 있다. 최종근 서울대 에너지자원공학과 교수는 2022년 석유공사 웹진 ‘석유사랑’을 통해 “기술발전과 극지와 심해를 포함한 미탐사 지역 그리고 부존량이 많은 비전통 석유 자원을 생각하면 향후 200년 이상 석유가 주력 에너지원으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라 전망했다.

 

 문제는 석유가 마르지는 않았지만 석유의 이동로가 막히자 고갈과 다름없는 상황이 됐다는 점이다. 실제 각국의 비축유가 말라가고 있다. 비축유는 정부가 유가 급등이나 공급중단에 대응하기 위해 비축해 두는 석유로, 국제에너지기구(IEA)의 권고 비축유 기준은 국가별로 약 90일 소비에 해당하는 물량이다.

 

국내 비축유 현황을 보여주는 한국석유공사 홈페이지 갈무리
국내 비축유 현황을 보여주는 한국석유공사 홈페이지 갈무리

 

 석유공사에 따르면 지난달 말 기준 우리나라는 1억 배럴의 비축유를 보유하고 있다. 여기에 민간에서 보유한 비축유 9000만 배럴을 합치면 총 1억9000만 배럴 수준이다. 국내 일평균 원유 소비량(약 250만~260만 배럴)을 고려하면 정부 비축 물량만으로는 약 40일 안팎, 민간 물량을 모두 소진해도 70~90일을 버틸 수 있는 정도. 정유 공장 가동 중단 막기 위한 최소 잔여유(데드스톡) 제외 시 실제 가용량은 더 적다는 것이 업계의 해석이다.

 

 정부는 3월부터 비축유 스와프(SWAP) 제도를 활용 중이다. 정유사가 해외에서 원유를 확보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면, 정부가 먼저 비축유를 빌려준 뒤 추후 대체 물량이 국내에 들어왔을 때 돌려받는 제도다. 최근에는 지난달 24일 비축유 스와프를 통해 약 580만 배럴을 시장에 공급했고, 11월 중순까지 960만 배럴 규모의 추가 스와프 수요를 파악해 지원할 방침이다.

 

 한 전문가는 “상황이 악화될 경우 비축유의 방출도 불가피하다”며 “결국 길게 보면 중동 이외의 공급처 다변화는 물론 핵과 재생에너지 등 대안 마련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박재림 기자 jami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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