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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양자 마르쿠스 아그리파에 의해 세운 신전 팡테온. 훗날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되는 옥타비아누스는 뛰어난 정치력을 발휘해 로마 제국을 반석 위에 올림으로써 카이사르가 그를 후계자로 세운 기대를 충족시켰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
"100!"
"500!"
"600!"
"1000!"
서로서로 높은 가격을 부르며 경쟁하는, 마치 미술품 경매장과 비슷한 풍경이 기원전 44년 로마에서 벌어졌다.
다만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경쟁자가 옥타비아누스(훗날의 아우구스투스)와 안토니우스라는 2명의 거물 정치가라는 점, 그리고 경매 대상이 미술품이 아니라 살아 있는 병사들이라는 점이었다.
즉, 수만의 병사들이 누구를 위해 싸울지를 두고 자신들에게 더 많은 보너스를 제시한 자를 선택한 것이다.
의무도, 의리도 아닌 돈으로 주군을 택하는 광경. 왜 당시 로마에서는 이런 촌극이 벌어진 걸까?
◇옥타비아누스가 대체 누구야?
기원전 44년 3월 15일 로마의 종신 독재관 카이사르는 원로원 회의에 참석하러 갔다가 브루투스와 카시우스 등 암살자들에게 암살당했다.
카이사르의 죽음은 당시 로마에 커다란 충격을 안겼다. 그는 수많은 로마 시민들을 죽인 내전을 발발시킨 범죄자이자 로마의 전통 공화정을 깡그리 무시하고 독재 정치를 펼친 독재자였지만, 어쨌거나 그 시기에는 로마의 안정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카이사르는 파르살로스 회전의 완승으로 폼페이우스와의 내전에서 최종적인 승리를 거뒀다. 이어 북아프리카와 히스파니아(현재의 스페인 및 포르투갈)에서 폼페이우스의 잔당들을 정리하고, 절대 권력을 움켜쥐었다.
피로 얼룩진 내전이 끝나면서 일단 로마는 카이사르 휘하에서나마 간신히 평화와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종신 독재관으로서 모든 정무를 총괄하던 카이사르가 파르티아 원정을 앞두고 암살당했으니 로마가 대혼란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카이사르는 로마의 정치 체제를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바꾼 인물로 유명하다. 그런 만큼 공화정을 유지하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증오의 대상이었다. 그들에게 카이사르의 죽음은 기회로 여겨졌다.
로마 정계는 카이사르 암살 후 두 쪽으로 갈라졌다. 카이사르를 독재자라고 비판하면서 공화정으로 회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암살자들을 비롯한 보수파와 상대편을 "은혜를 모르는 암살자"라고 비난하는 카이사르파가 대립했다.
서로가 서로를 비난하는 연설을 하는 것은 물론 로마 시내 곳곳에서 물리적인 충돌까지 벌어졌다.
그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공개된 카이사르의 유언장은 정계에 더 큰 파문을 일으켰다. '제1상속인'이 옥타비아누스라고 적혀 있는 탓이었다. 유언장을 본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옥타비아누스가 대체 누구야?"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는 당시 겨우 19살밖에 안된, 정치 경험도 군단 경험도 전혀 없는 풋내기였다. 카이사르의 누이 율리아의 딸 아티아와 옥타비우스의 아들로 가까스로 혈연이 닿긴 하지만, 별로 가까운 친척도 아니었다.
로마의 절대 권력자이자 투표로 뽑는 공화정이 아닌, 세습으로 이어지는 제정을 기획한 카이사르다. 그런 그가 '제1상속인'으로 지정한 사람이 단지 유산 상속만 받는 사람일 리는 없었다.
카이사르의 '제1상속인'은 곧 그의 후계자이자 차후 그의 권력을 승계받을 사람이었다. 그런데 카이사르가 지명한 '제1상속인'이 10대의 무명 청년이니 사람들은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사실 카이사르는 그 때까지 별다른 병치레도 없는 자신의 건강을 믿고, 옥타비아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한 것이었다. 자신이 훨씬 더 오래 살 거라고 예상해 천천히 키울 생각으로 세운 후계자니 이 때에는 완전히 무명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가 후계자로 지정할 만큼 뛰어난 정치력과 결단력을 어릴 때부터 보여준다.
압권은 카이사르의 옛 병사들을 앞에 두고 보여준, 돈을 아까워하지 않는 화끈함이었다.
◇1000데나리우스 보너스로 손에 넣은 군대
암살자 등 보수파는 처음에만 기세를 올렸을 뿐 곧 사그라 들었다. 무엇보다 암살의 명분이 너무 약했다. 겉으로는 '공화정 복귀', '독재자 타도' 등을 내세웠지만 그 속내가 무엇인지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암살 주모자 중 카시우스는 카이사르 밑에서 일하는 관료였다. 다만 주류가 아니라 비주류였다. 그는 카이사르가 살아있는 한 자신이 높이 출세하기는 힘들다고 느끼자 암살을 계획했다.
또 다른 주모자인 마르쿠스 브루투스는 카시우스에 의해 끌려 들어온 '얼굴마담'이었다. 그는 청렴한 관료로 유명했으나 단지 청렴할 뿐 별다른 능력은 없었다. 그래도 깨끗한 처신과 카이사르이 최대 정적 카토의 딸 포르키나와 결혼 상징성 때문에 보수파의 주목을 받았다.
특히 브루투스는 자신의 어머니가 카이사르의 애인인 것을 늘 부끄러워했다. 그래서 카시우스의 꼬드김에 넘어간 것이다. 그 외 암살자들 중에도 카이사르 밑에서 일하던 장군이나 관료 출신이 많았다.
그러니 이런 인간들이 외치는 명분을 시민들이 믿어줄 리 없었다. 초조한 암살자들은 카이사르 비난에 열을 올리다가 도리어 일을 그르쳤다.
마르쿠스 브루투스는 본래 폼페이우스파였다가 내전에 패한 뒤 카이사르의 용서를 받아 정계에 복귀했다. 또 다른 암살자 데키우스 브루투스는 카이사르가 ‘제2상속인’으로 지명한 인물이었다.
카이사르의 은혜를 입은 인물들이 그 의리를 헌신짝 버리듯 저버리니 여론은 더 차가워졌다. 여론의 외면을 받으면서 몰락한 암살자들은 신변의 위협까지 가해지자 살기 위해 그리스, 소아시아 등으로 도망쳤다. 리더를 잃은 보수파는 와해됐다.
이후 로마 정계는 카이사르의 후계자 옥타비아누스와 카이사르파의 중진인 안토니우스의 대결로 흘러가게 됐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휘하에서 종군한 장군이자 당대의 실력자로 유명했다.
그들의 첫 경쟁은 파르티아 원정을 준비하기 위해 그리스에 주둔해 있다가 귀국한, 카이사르의 옛 병사들을 두고 벌어졌다.
갈리아 원정부터 카이사르를 따라다니면 10년 이상 종군한 베테랑 병사들은 당시 로마의 최정예 병력이었다. 결국 칼로 결판나게 될 차후의 권력 투쟁에서 이들은 중요한 ‘엑스(X) 팩터’였다.
먼저 안토니우스는 병사들에게 데나리우스 은화 100닢, 즉 100데나리우스를 보너스로 제시했다. 그는 병사들과 함께 어깨를 맞대고 싸운 적이 있기에 그 점에서 유리함을 자신했다.
하지만 옥타비아누스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안토니우스보다 인망도 뒤지고, 병사들과 함께 싸운 적도 없는 옥타비아누스는 깜짝 놀랄 만큼 과감하게 나왔다. 무려 안토니우스의 5배, 500데나리우스의 보너스를 지른 것이었다.
아무리 옥타비아누스가 무명이라고 해도 이 정도 돈 차이면 흔들리지 않을 수 없다. 병사들이 옥타비아누스 쪽으로 기울자 당황한 안토니우스가 600데나리우스로 보너스를 올렸다. 그러자 옥타비아누스는 지체 없이 1000데나리우스를 외쳤다.
일반 병사들의 평균 연봉이 140데나리우스에 불과하던 시절이다. 1000데나리우스면 무려 7년치 연봉이다. 카이사르의 옛 병사들은 옥타비아누스의 화끈한 보너스에 열광했으며 너무 큰 지출을 꺼려한 안토니우스가 뒤로 물러나면서 이 경매(?)는 옥타비아누스의 승리로 끝났다.
더 재미있는 부분은 옥타비아누스가 그다지 부자도 아니란 점이었다. 그는 귀족이긴 했지만 평범한 가문 출신이라 가문의 재산은 하위권이었다. 개인 재산으로나 유력한 후원자들로나 안토니우스의 재력이 압도적이었다.
게다가 응당 받아야 할 카이사르의 유산조차 안토니우스가 가로챈 상태였다. 그럼에도 옥타비아누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카이사르의 절친인 금융업자 마티아스에게 빌린 돈으로 자금을 충당했다. 빚으로 정치를 하면서 수만 병사들에게 어마어마한 보너스를 쏜다는 것은 자칫 잘못하면 파산으로 연결될 수도 있는 위험한 수법이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의 화끈한 도박은 대성공으로 이어진다. 안토니우스처럼 수많은 정예 군단을 거느리고 있지 않은 그는 돈을 아낌없이 질렀기에 자신을 따르는 첫 군대를 만들 수 있었다.
이후 안토니우스의 아내 풀비아의 반란 진압, 폼페이우스의 아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토벌, 안토니우스와의 '2차 내전' 등에서 카이사르의 옛 병사들은 맹활약을 했다. 덕분에 옥타비아누스는 최종적인 승리를 거머쥐었다.
로마의 지배자가 된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에 다시 평화를 안긴 공적 덕에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존귀한 자)'라는 위대한 경칭까지 받았다. 그 뒤의 내정에서도 옥타비아누스는 위대한 업적을 쌓아 로마 제국의 기초를 닦았다.
카이사르가 옥타비아누스를 지명한 것은 역사에 남을 후계자 선정으로 일컬어진다.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처럼 돈을 아까워했다면 얻을 수 없었을 영광이었다.
여담이지만 이 때의 에피소드에 대해 역사가 프란츠 하이켈하임 등은 카이사르의 옛 병사들이 카이사르에게 심취해 있었기에 그가 후계자로 고른 옥타비아누스에게 충성을 맹세했다고 미화해서 전했다.
하지만 병사들이 옥타비아누스를 택한 결정적인 이유는 뜬 구름같은 의리가 아니라 눈앞의 돈이었다.
안재성 기자 seilen78@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