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분야에서 성공신화를 일궈낸 사람과 기업들을 보면 그 노하우와 비결이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최고라는 타이틀은 우연히 얻어지는 것이 아닐 것이다.
최고가 된 이들은 숱한 실패와 좌절 속에서도 남들과 다른 '차별성'을 갖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지금의 모습을 갖게 됐다.
세계파이낸스는 성공한 기업 또는 인물들의 성공을 위한 밑거름은 무엇인지, 그들만의 노하우와 비결은 무엇이었는지 [왜/어떻게] 시리즈를 통해 들여다본다. <편집자주>
최고가 된 이들은 숱한 실패와 좌절 속에서도 남들과 다른 '차별성'을 갖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지금의 모습을 갖게 됐다.
세계파이낸스는 성공한 기업 또는 인물들의 성공을 위한 밑거름은 무엇인지, 그들만의 노하우와 비결은 무엇이었는지 [왜/어떻게] 시리즈를 통해 들여다본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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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평택 삼성 반도체 공장. 사진=삼성전자 |
'시작은 미약하지만 끝은 창대하리라'. 성경에 나오는 구절로 오늘의 삼성을 있게 한 반도체에도 딱 들어맞는 말이다.
삼성이 D램 사업에 발을 들여놓은 1983년 세계 시장에서 삼성 반도체의 존재감은 미약했다. 시장조사업체 가트너에 따르면 1985년 삼성전자 반도체 매출액은 9500만달러로 세계 시장 42위에 불과했다.
그러나 D램 시장 선두에 올라선 1992년 삼성전자의 반도체 매출은 19억달러까지 늘었고, 작년에는 연간 매출 239조6000억원, 영업이익 53조6000억원으로 미국 인텔을 끌어 내리고 1위 자리에 올랐다.
삼성과 반도체는 한국 경제에서의 비중도 상당하다. 우리나라 수출에서 반도체가 차지하는 비중은 2013년 9.0%에서 작년 16.1%에 달한다.
아쉽게도 삼성 반도체가 어떻게 세계 메모리 시장을 석권했는지 그 역사를 자세히 아는 이는 드물다. 그리고 회사의 성공과 본인의 성공을 동일시했던 삼성맨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어려웠을 반도체 성공 신화에 대해 지금부터 알아본다.
◇ "삼성 반도체는 성공할 수 없다!"
삼성이 반도체 산업에 진출한다고 했을때 일본의 미쓰비시 연구소는 '삼성 반도체는 성공할 수 없다'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기술력이 부족한데다 국내 내수 시장이 작다는 이유에서였다.
국내외 여론들도 이와 같은 부정적 의견에 합세했다.
국내 전문가들은 '우리 실력으로 무슨 반도체인가!', '3년도 못가고 실패할 것'이라면서 냉소의 시선을 보냈다. 당시 경제기획원조차 "이병철 회장의 처음이자 마지막 실패작"이라고 했고, 한국개발연구원(KDI)는 "반도체 산업은 인구 1억이 넘고 1인당 국민소득이 1만달러를 넘으며 생산량의 절반을 국내에서 소비할 수 있는 나라에서만 가능한 사업"이라는 보고서를 냈다.
회사내에서도 '반도체가 아니어도 먹고살 수 있는 아이템이 많다', '삼성 전체가 흔들릴지도 모른다'며 우려했다. 이같은 반응은 당연했다. 반도체 산업은 당시 한국이 가지 않았던 첨단기술 산업인 동시에 막대한 투자비용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잘못될 경우 삼성 그룹이 위기를 맞을 수도 있었다.
1974년 삼성은 이건희 당시 동양방송 이사가 우리나라 최초 반도체 기업인 한국반도체를 지분을 인수, 삼성반도체로 상호를 고쳐 사업을 진행했다. 그 당시만 해도 삼성은 반도체 부문을 키울 생각은 없었다.
자체 설계 능력이 부족했고 생산할 수 있는 품목도 트랜지스터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부도 위기를 거듭하면서 삼성반도체는 1980년 삼성전자에 흡수합병된다.
한번은 이병철 회장이 침체에 빠진 삼성반도체에 대해 고바야시 고지 일본 NEC 회장에게 문제점 지적과 함께 반도체 기술을 부탁했다. 하지만 고바야시 회장은 "돈을 빌려줄 수 있지만 기술은 빌려드릴 수 없다"며 단칼에 거절한다.
고바야시 회장의 거절에 자존심이 상한 이 회장은 미국과 일본을 오가면서 수 많은 전문가들을 만난다. 오직 NEC를 잡기 위해서였다. 이 회장은 이건희 당시 부회장과 미국을 돌며 반도체 생산라인을 둘러봤고 결국 1983년 3월 일본에서 '왜 우리는 반도체 사업을 해야 하는가' 반도체 사업 진출을 발표한다. 이 회장은 일본이 오일 쇼크에도 승승장구하는 비결을 '반도체'에서 찾았다.
우려와 냉소 속에서도 이 회장은 자신의 결단을 믿었고 실행에 옮겼다. 이후 반도체 부문은 삼성전자에서 가장 바쁜 부서가 됐다. NEC를 잡기 위한 사업성 검토, 전망 등에 대한 디테일한 분석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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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창업주인 고 호암 이병철 선대회장. 사진=뉴시스 |
◇ 64kD램 자력 개발 성공, 성공 DNA 심다
1983년 4월 삼성은 첫 반도체 사업 품목으로 D램을 선정한다. D램은 불황이 오면 대규모 적자를 각오해야 한다. 그러나 이 회장은 대량 생산이 가능한 D램이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삼성은 뜸들이지 않고 바로 2개월 뒤 마이크론과 64k D램 기술 이전 계약을 체결했다.
마이크론은 D램 설계도와 마스크(회로 패턴을 새긴 원판), 완제품 3000개를 삼성에 제공했고, 삼성은 시헙 조립 생산에 성공한다.
그러나 마이크론은 핵심 제조 공정 기술 연수를 제대로 해주지 않았다. 미래 경쟁자가 될 수도 있다는 판단에서 삼성 연수팀을 적대적으로 대했고 질문을 피하는 등 기술을 숨기려고 애썼다.
이같은 마이크론의 태도에 계약서가 무의미해졌고 삼성은 자체 개발로 방향을 선회한다.
사실 이때 삼성이 64k D램 개발에 성공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국내외 전문가들은 3년 뒤인 1986년쯤에야 64k D램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봤다.
이윤우 전 부회장은 1983년부터 VLSI(고밀도 집적회로) 사업추진팀장을 맡아 64k D램 개발을 이끌었다. 개발은 실행과 반복, 그리고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 당시 반도체 부문은 그룹내 애물단지였다. 그룹사에서 버는 돈을 족족 투자했지만 1986년까지 누적적자가 2000억원이 넘었다.
기술 연수에서 눈동냥, 귀동냥으로 배웠던 기술을 적용하느라 실패가 계속됐다. 그럼에도 개발팀은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불과 6개월 뒤인 1983년 10월6일, 삼성은 모든 공정을 개발해내고 웨이퍼를 투입하기에 성공했다고 발표한다. 당시 세계에서 64k D램을 양산하는 회사는 단 10개사에 불과했다.
반도체 칩 디자인은 마이크론에서 배웠지만 칩의 생산부터 조립, 검사 과정을 모두 자체 기술로 개발한 것이다.
이후 삼성은 1984년 10월8일 256K D램 개발, 2년 뒤인 1986년 7월13일 1M D램이 개발, 1992년 세계 최초로 64M D램을, 1994년 8월29일 세계 최초 256M D램까지 연달아 성공하면서 삼성 반도체의 우수성을 전세계에 알린다.
삼성 신조인 '안된다는 생각을 버려라', '끝까지의 목표', '지나칠 정도의 정성' 이라는 성공 DNA에 뿌리 내린 것도 이같은 성공에 따른 것이다.
◇ 공격적 투자, 기술 개발을 이끌어내다
후발주자로서 선발주자들을 따라잡을 수 있는 방법은 공격적인 투자에 있다. 투자 규모에서 경쟁사들을 압도했고 넘치는 설비는 활용도 연구와 자연스레 신제품 기술 개발로 이어졌다.
삼성경제연구소에 따르면 1987년에서 1992년 사이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부의 매출 대비 자본지출 비율은 39.8%였다. 이는 당시 세계 반도체 평균인 20.5%의 두배에 가까웠다. 삼성전자의 이 비율은 1980년대에는 50%에 달하기도 했다.
1988년에서 1991년 삼성전자의 연평균 D램 투자액은 3억9600만달러로 도시바·NEC·히다찌·후지쯔 등 일본 4대 기업 평균 투자액의 2.8배에 달했다.
삼성전자는 업계 선두가 된 뒤에도 투자를 줄이지 않았다. 1993~2000년 사이 D램 투자액은 연평균 1억3400만달러로 일본 4배사보다 4.7배나 많았다.
더욱이 투자 액수 못지 않게 투자의 속도와 질도 달랐다.
삼성전자는 1990년대 초반 6인치 웨이퍼에서 8인치 웨이퍼로 전환될때와 1990년대 후반 12인치 웨이퍼로 전환될때 위험을 무릎쓰고 가장 먼저 투자에 나서 경쟁업체들을 따돌렸다.
웨이퍼는 반도체 집적회로의 원재료로 사용되는 실리콘 단결정으로 된 원판모양의 기판으로 이 기판에 빛을 쬐거나 불순물 가스를 확산시키는 가공법으로 트랜지스터, 저항, 콘덴서 등의 부품을 만들고 회로를 구성한다.
웨이퍼의 크기를 늘리면 반도체를 만드는데 사용되지 못하고 버려지는 웨이퍼의 양을 줄여 웨이퍼 단위당 반도체 생산량을 늘릴 수 있다. 3, 4, 5인치 웨이퍼는 미국이, 6인치는 일본이 선도했다.
다른 경쟁사들이 당시 시장상황과 기술적 불확실성으로 8인치 투자를 주저하고 있었다. 삼성전자가 8인치 웨이퍼 투자에 나설 1990~1991년 세계 D램 시장은 불황을 맞이했다. 일본업체들은 투자를 줄였고, 삼성전자는 일본을 추월하기 위해선 8인치 웨이퍼 투자에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고 판단했다. 일본이 6인치 개발로 미국을 추월했던 것처럼 삼성도 8인치 웨이퍼 개발로 다른 기업들과의 차이를 벌릴 수 있었다.
6인치 웨이퍼에 비해 8인치 웨이퍼의 생산성은 1.8배 상승하는데 반해 단위 투자 비용은 1.4배 상승한다. 즉, 생산성 상승분이 투자상승분을 웃돌았다.
당시 설비업체들도 삼성전자를 적극 지원했다.
8인치 설비 개발에 많은 시간과 자금을 투자한 설비업체들은 적극적으로 삼성을 지원했다. 설비업체들로서는 삼성전자의 성공이 자신들의 성공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장비업체들은 설비를 할인해서 제공했고 삼성전자는 이에 따라 투자 비용을 1.2배 수준으로 줄일 수 있었다.
이같은 방식은 8인치 웨이퍼에서 12인치 웨이퍼로 전환할때에도 반복됐다.
삼성이 이렇게 조기투자를 감행하면서 얻는 수익은 대단했다. 제품수명주기 초기 단계에서 비싸게 제품을 팔 수 있어 경쟁업체보다 투자비용도 빨리 회수할 수 있고, 불황을 이겨나갈 여력도 축적할 수 있었다.
더욱이 투자가 계속되면서 기술 개발 속도도 빨라졌다. 대규모 투자 이후 신규설비를 가동하면 각종 기술적 과제들을 해결해야했고, 설비 활용도를 높이기 위해 새로운 제품을 만들거나 설비를 다른용도로 이용하는 방법을 연구해야 했다.
당시 고위직 임원은 "설비를 빨리 가동하기 위해 신제품 개발을 계속했고, 설비 활용도를 높이기 위해 여러가지 대안을 찾아야했다"고 말했다. 삼성전자가 생산단가를 낮추고 제품 다각화를 추진할 수 있었던 데는 대규모 생산설비가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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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삼성전자 |
◇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삼성 반도체
1990년대 초반에는 미국 반도체 업계가 경쟁자인 삼성전자를 반덤핑 제소하면서 수출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미국은 1980년대 세계 시장을 석권했던 일본산 반도체를 이같은 방식으로 쇠퇴의 길로 몰았다. 반덤핑 직권조사가 진행 중이던 1986년 일본은 5년간 일본 국내 시장의 20%를 미국산 반도체 제품에 내주고 일본산 반도체의 저가 수출을 중단하겠다는 내용의 반도체 협정에 서명했다. 이후 일본은 후발 주자인 한국에 반도체 선두 자리를 내주게 된다.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 애플 PC 붐에 힘입어 64k, 256k D램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었고, 삼성전자는 반도체 사업 관련 누적 적자를 해소하고 흑자로 돌아설 수 있었다.
삼성은 미국의 이같은 움직임에 D램 가격이 높아지면 미국 PC 산업에 악영향을 미쳐 HP, IBM, 컴팩 등이 어려워질 것이란 인식을 미국에 심었고 여론을 바꾸는 작업에 집중하며 위기를 벗어나게 된다.
불황 역시 오히려 1위를 굳건히 하는데 좋은 기회가 됐다.
삼성은 불황기마다 적극적인 투자를 시행했고 불황이 끝난 후 넘치는 시장 수요는 온전히 삼성전자의 것이 됐다.
2008년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로 세계 경제가 시름하던 당시 메모리 반도체 가격은 폭락을 거듭했다. 대만반도체와의 경쟁과 글로벌 위기가 겹치면서 삼성전자 반도체사업부도 2008년 2개 분기 연속 6000억원대 손실을 기록했다.
이건희 회장은 글로벌 금융위기로 세계 경제가 침체에 빠졌던 2008년에 전년보다 15% 늘어난 14조1000억원을 시설투자에 썼다. 이어 2010년에는 화성 반도체 공장에 총 26조원을 들이는 대규모 투자를 단행했다. 이 같은 선제적이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과감한 투자는 삼성전자 반도체의 장기 성장 토대를 마련하게 된다.
◇ '회사가 살아야 내가 산다'…삼성맨의 자부심
'삼성맨'은 삼성에서 근무하는 모든 사람을 통틀어 이르는 말로, 초일류 삼성의 기업정신에서 나왔다. 흔히 봉급도 높고 타 회사에 비해 안정성이 뛰어나기 때문에 나온 말이기도 하다. 삼성맨이라는 위상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삼성 그룹 청소원, 경비원 분들에게까지 자부심을 안긴다.
흔히 삼성맨들은 스피드 속에서도 디테일을 강조한다고 한다.
회의에서 논의된 업무를 철저하게 실행하고 확인하는 방식이 꾸준하게 진행됐고 구성원 모두가 솔선수범했다. 조직구성원들은 각자의 의견을 스스럼없이 표현할 수 있었고 스스로가 프로라는 의식을 갖고 자발적으로 업무를 수행했다.
또 성공이 거듭될수록 자부심은 쌓여 갔다. 삼성에 다니는 한직원은 "직원들이 자기 관리에 철저하다. 회사가 살아야 내가 산다는 각오로 일하고 성공을 믿는 긍정의 DNA가 조직내 퍼져있다"고 말한다.
직원들의 경쟁심, 애사심도 높다. 또 다른 직원은 "회사내 동료와도 경쟁하는 무한 경쟁 문화와 성과제일주의 원칙에 휴일도 반납하고 일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극한의 환경 속에서 일하면서도 삼성맨은 삼성이라는 조직에 관해 언제나 최상의 충성심을 보이고 있다.
적절하고 파격적인 보상도 삼성맨의 자부심을 끌어 올린다. 삼성의 성과에 대한 직원 보상은 다른 기업 직원들에게 허탈감을 안기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그들이 일하는 것에 대한 정당한 대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늘어가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삼성 출신 인사에 대한 영입도 치열하다"며 "각 영역에서 삼성의 DNA를 높이 평가하고 이를 필요로 하는 곳이 많다는 의미가 아니겠냐"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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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가 2010년 5월17일 삼성나노시티 화성캠퍼스에서 당시 권오현 사장, 이건희 회장, 최지성 사장, 이재용 부사장, 윤주화 사장, 정칠희 부사장(반도체연구소장), 전영현 부사장(D램 개발실장(왼쪽부터)이 기공식을 갖고 있다. 사진=삼성전자 |
◇ 다가오는 위협, 다시 한번 기로에 서다
중국 반도체기업들은 정부 지원을 받아 현재까지 연구개발과 시설투자에 200조원 이상을 투입했다.
최근 중국은 미국과의 통상 갈등 속에서 한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바로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등 해외 부품업체 의존도가 높은 분야에서 자급도를 높이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중국 주요 기업에 투자 지원 및 혜택을 아끼지 않으면서 반도체 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아직은 삼성전자의 경쟁상대는 되지 않지만 삼성전자의 성공방식을 연구한다면 기술 격차는 예상보다 빠르게 줄어들 수 있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전망하고 있다.
삼성을 압박하는 국내외 변수들은 한두가지가 아니다. 과거 든든한 정부 지원이 있었지만 이제는 외로운 싸움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삼성 반도체가 제로 베이스에서 세계 1위에 올라서게 된 것은 정부의 지원이 컸다. 정부는 1994년 반도체보호법을 만들어 반도체의 지적재산권을 보호했고, 자금과 인재 등에서도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하지만 지금은 예전과 같은 정부의 지원을 기대하기는 힘든 상황이다.
게다가 빠른 의사결정과 실행으로 초일류 삼성을 있게 한 '스피드 경영'도 사실상 어려워졌다.
선대 이병철 회장, 이건희 회장 등 수뇌부의 결단에서부터 실행이 일사천리로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은 오너 경영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건희 회장은 1997년 회고록에서 8인치 웨이퍼 투자를 결정할 당시에 대해 "실패하면 1조원 이상의 손실이 예상되는 만큼 주변에서 반대가 심했다"면서 "그러나 우리가 1위로 발돋움하려면 그때가 적기라 생각했고 월반하지 않으면 영원히 기술 후진국 신세를 면치 못하리라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미래전략실' 해체로 그룹 구심점이 사라진데다 정부로부터 기업지배구조 개선 압박을 받으면서 전과 같은 스피드 경영은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다.
현대 기술 개발은 속도에 달려 있다. 불확실성이 많이 남아 있을 때는 빠른 의사 결정이 답이 될 수 있다. 전문경영인 체제하에서는 위험부담을 떠안는 장기 투자를 기대하기가 쉽지 않다.
업계 한 전문가는 "오너 경영이 반드시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다"면서도 "오너 개인의 능력 차이는 기업의 성공 여부를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정부의 지배구조 개선 압박, 중국의 반도체 굴기 등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 삼성이 어떤 선택을 할 지 귀추가 주목된다. 신속한 판단과 과감한 결정으로 위기를 극복해온 삼성에게 또다른 결단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장영일 기자 jyi78@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