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호르무즈 군사 작전 동참 발언에도 신중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5일 청와대 등 각 정부 부처에 따르면 정부는 지난 4일 호르무즈 해협에서 한국 선사 HMM이 운용하는 선박에 폭발 사고가 발생한 것과 관련해 “정확한 사고 원인을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밝히면서도 따로 안전보장회의(NSC) 회의를 포함한 안보 관련 회의를 개최할 계획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이날 비서실장 주재로 호르무즈 선박화재 대응 회의를 진행했다.
일각에서는 이번 일로 호르무즈 해협에 대한 파병 압력이 더욱 거세지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오는 실정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메시지는 이란이 한국 화물선을 공격했기 때문에 미국이 주도하고 있는 호르무즈 해협 개방을 위한 선박 보호·호위 작전에 한국군이 참여할 필요성이 커졌다는 취지로 발언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국방부와 외교부를 비롯한 각 부처 모두 신중하게 사고 원인 파악에 주력하고 있다. 물론 얼마 전 이재명 대통령이 영국과 프랑스가 주도하는 호르무즈 해협 자유항행을 위한 국제 정상회의에 참석해 실질적 기여를 약속한 바 있어 가능성을 열어두고 검토할 순 있지만 당장 파병을 발표할 상황은 아니라는 분위기다.
만에 하나 미국이 주도하는 작전에 동참하는 형식으로 파병한다면 이란 등의 반발을 불러올 수 있다. 일본은 미국과 이란 간 등거리 외교로 자국 선박을 탈출시키는 상황이고 영국과 독일 등도 미국의 이번 작전 참여에 명확한 의사를 밝히지 않은 상태에서 섣불리 한국 정부가 나섰다면 이란 등으로부터 표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호르무즈 해협의 항행 안전을 위해 손을 놓고만 있을 수 없는 상황이어서 영국과 프랑스 등 여러 동맹국들과 협의를 거쳐 균형 있는 외교를 펼쳐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일관된 주장이다. 무엇보다 경제 안보를 위해서라도 섣부르게 행동에 나서기보다는 신중하게 상황을 살핀 후 대응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 호르무즈 해협에서 이란이 아랍에미리티(UAE)와 민간 상선 공격을 재개하고 미군도 무력 행사에 나서는 등 긴장이 고조되면서 국제 경제에도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이날 미국 뉴욕증시 주요 지수는 중동 지역 긴장 고조 속에 일제히 하락 마감했다. 이날 뉴욕증시에서 다우존스30 산업평균지수는 전장보다 557.37포인트(1.13%) 내린 4만8941.90에 거래를 마쳤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500 지수는 전장보다 29.35포인트(0.41%) 내린 7200.77에, 기술주 중심의 나스닥 종합지수는 전장보다 46.64포인트(0.19%) 내린 2만5067.80에 각각 마감했다.
정부는 한국 선박의 폭발·화재가 발생하고 약 3시간 20분 뒤인 이날 0시 재외국민보호대책본부 회의를 개최했다. 외교부에 따르면 회의는 김진아 2차관 주재로 열렸으며 중동 지역 7개 공관과 해양수산부가 참석했다.
김 차관은 중동 전쟁 발발 이후 처음으로 호르무즈 해협 내에서 한국 선박에 피해가 발생한 데 대해 깊은 우려를 표하며 “다행히 이번에는 인명 피해가 없었지만 원인 파악과 함께 재발 방지 노력이 필요하다”며 “언제든지 한국 선원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신속하게 취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두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해양수산부에 따르면 현재 호르무즈 해협 안쪽에 발이 묶여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한국 국적 선박은 모두 26척이다. 이 가운데 유조선은 9척이며 나머지 선박들에는 자동차 운반선도 포함됐다. 한국 국적 선박에 승선 중인 한국인 선원은 123명이다. 호르무즈 해협 안쪽 외국 국적 선박에 타고 있는 한국인 선원 37명을 포함하면 해협 내 한국인 선원은 모두 160명이다.
외교부에 따르면 폭발·화재 사고가 발생한 선박 내 화재는 인명 피해 없이 진압돼 추가 피해는 없는 상태다. 다만 선박의 정상 운항 가능 여부는 아직 불확실하다. 정부는 인근 항구로 예인한 뒤 피해 상태 등을 확인하고 수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HMM 측도 선박을 인근 두바이항으로 이동시킬 것이라고 밝혔다.
이와 함께 해수부는 호르무즈 해협 인근 한국 선박들에 대해 안전한 해역으로 이동하도록 조치했다고 밝혔다. 황종우 해수부 장관은 사고 발생 직후인 전날 오후 10시쯤 긴급 상황점검회의를 열어 “우리 선원과 선박의 안전을 위해 필요한 조치에 최선을 다하고 인근 우리 선박에 대해 안전한 해역으로 이동할 것”을 지시했다.
김재원∙박재림 기자 jkim@segye.com